어제는 미술 시간이었어요. 연필이 나를 반쯤 그리는 동안 나는 서서히 태어났습니다. 여전히 그대로군. 맘에 안 들어. 연필이 툭 떨어졌습니다.
구겨진 종이가 몰래 펼쳐지듯 쓰레기통 속에서 입을 벌렸어요. 새 옷을 입듯 사람의 냄새를 훔치고 반만 그려진 눈을 활짝 떴습니다.
어제는 달리기를 했어요. 허들을 넘듯 한 아이, 두 아이, 세 아이……를 지나 나는 그 애에게 비로소 도착했습니다. 뒤로 달리는 연습은 그만하자. 안녕, 안녕, 마지막 아이가 희미해진 손을 들어 인사했습니다.
어제는 이름 바꾸기 놀이를 했어요. 한 이름과 다른 이름은 어떻게 구분하니? 그 애에게 물었을 때 몰라, 몰라, 몸에 다닥다닥 붙은 이름들을 떨어뜨리며 그 애는 울었어요. 얼굴은 이미 지워진 것만 같았어요.
오늘 나는 구겨지다 만 종이였다가 오후 다섯 시의 바람이었다가 지금은 거의 안개의 목소리입니다. 내일은 사람처럼 눈물을 흘릴 수 있을까요? 나는 아직 배울 게 많고 내일은 해가 질 때까지 그림자를 밟으며 꼬리잡기 놀이를 하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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