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태어났어
추워, 라고 말하면 정말 추워서 이 세상을 떠도는 모든 먼지들을 모아 옷을 만들어 입고 싶었지
태어났을 뿐이었어, 누군가 나를 자라게 했어
아직 꽃술을 열어보지 못한 꽃들이 성교를 하느라 바쁜 들판에 누워
아직 단 한 번도 새끼를 낳아보지 않은 새들이 지나가는 것을 보며
나비에게도 잠자리에게도 덜 익은 빛을 보여줘, 라고 공기에게 말했던 적도 있었어
나와 자연은 사실혼 관계
법정에서는 서로에 대해 아무 권리가 없다는 걸 늦게사 알았지
나에게 말을 거는 저 암소가 일찍이 나에게 수유를 한 어머니라는 걸
당신이 알았으면 좋겠어
매일 어디론가 사라졌다 다시 나타나는
하늘에 있는 공들에게도 내 수유의 어머니,
그 고깃덩어리가 걸린 정육점을 단 한 번이라도 보여주었으면 했어
공들은 내가 인간이라는 걸 알까? 인간을 수유하는 암소들을 생산하는
더러운 거리 구석에 있는 도살장을 알까,
저것 봐, 아이가 불어대는 풍선 어떤 포유류의 방광이 하늘로 가서
먼 들판을 은은하게 비추어대는 하늘의 공이 되네
시간을 잘라 만든 혁대를 목에 감고 죽은 테러리스트가 살던 감방 안에서 자라던 작은 백합의 뿌리는 세계를 버티는 나무처럼 테러의 주검을 견뎌내고 있었어
아주 어린 중세가 대륙 저편에서 현대처럼 활개를 치고 있네, 그 말을 듣기 위해 춤을 추러 가는 아이들에게
나, 태어났어, 라고 말해봐, 말해봐
아이들이 당나귀처럼 웃으며 내 얼굴에다 총을 들이댈 거야
피가 솟구치는 숨겨진 샘이 있다라거나
죽을 수 없는 인간들이 매일매일 전쟁을 한다거나
그리고 당신이 날 사랑한다거나
그리고 그리고 그 말을 내가 믿는다거나 하는
엄숙하게 웃기는 나날 동안
나, 태어났어
아퍼, 라고 말하면 너무나 아파서 이 세상의 밤을 떠도는 모든 안개를 엮어 붕대를 만들고 싶었지
안개붕대를 감고 누워 컴컴하게 웃고 있었으면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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