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 늘어진 태양이 속살을 헤집는다 입김 하나가 바꿔놓은 바람의 방향을 추적하면 당신이 오래 전에 적어놓은 미래의 기별을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른다 골목 어귀에 숨어 오수에 빠진 고양이의 갈색 털 한 가닥이 얕게 가라앉은 시간의 등피를간질인다 영원이 들려주는 음악이란 이토록 가벼운데 창 밖에서 쿵쾅쿵쾅 대기를 지압하며 넘어오는 피아노 소리는 숨막히게 슬픈 곡조만 헛된 꽃가루처럼 날려댄다
슬픔이 이토록 구차한 것인 줄 미리 알았더라면 나는 오래 전에 사막으로 건너가 뜨거운 피를 말렸을 것이다 세월이 빠져나간 몸뚱이는 병든 바다처럼 오래된 물길을 떠올리며 미지근해진 머릿속의 잔해들을 헤쳐나간다 몸이 지난 자리마다고여 있는 기억들을 수시로 처가는 건 내일에 속하는 그때의 바람일 뿐, 영원한 현재 속에 갇힌 이 짧은 죽음은 잠에서 깬 고양이가 다른 골목으로 불현듯 사라지는 모습처럼 도대체 정체가 없다 오로지 빚을 진 데라고는 죽음밖에 없는 내가 순간마다 바뀌는 바람의 방향 속에 모든 죽음을 완성해버린 것이라면 그토록 가혹한 부채탕감이 또 있겠는가
이 길고도 얕은 잠은 당신이 미리 써버린 과거의 내 일기라는 걸 알더라도 나는 여전히 당신을 아는 척할 수 없다 늦은 밤 집 앞에서 다시 만난 갈색 고양이의 푸른 눈빛이 무언가 알려준다 하더라도 밤이 되도록 끊이지 않는 이 검은 피아노의 하소연에 응해줄 대답을 나는 오래 전에 다 뱉어버리고 말았다 피아노 소리가 멈추고 나서야 고양이 눈 속에 숨은 당신은 비로소 나의 기록들을 전부 펼쳐 보이겠지만 지금은 바람이 없기에 깨어남도 망가짐도 없다 뚜렷하게 죽어 있느니 혼란스레 사라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