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 2

이혜미, 마트로시카

2017. 12. 10. 16:03


늦은 새벽 애인이 울며 잠 속으로 전화를 걸어온다 깨어보니 아무도 없어, 이 방 가득 나 혼자뿐이야 비가 오는데, 그림자조차 없이……

나는 조용히 답한다 세상에 발자국 하나 남기지 않고 살다 가는 기린처럼 모두 방 하나에 자신을 영영 가둬두고 산다고 그 안에서 나를 낳고 또 낳아 비좁은 방이 나로 가득할 때, 아귀가 딱 맞는 몸들 속으로 기어들어가 후우, 숨 내뿜으면 입안에서 흘러넘치는 어둠의 덩어리들

비가 오는데, 수만 겹으로 저를 복제하는 빗방울 속에서 두 발이 자꾸만 사라지는 새벽 세상에 발자국 하나 남기지 못하는 수십 개의 몸을 이끌고 전화를 받는다 겹겹의 몸속에 갇혀 웅웅 거대한 울음의 힘으로 자전하는 지구의 검고 어두운 내부에서, 애인이 늦은 새벽 잠을 깼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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