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 2

조혜은, 장마 ㅡ통화

2018. 12. 23. 23:49
여기는 밤이 깊어. 하지만 네가 있는 그곳에서는 밤보다 깊은 외로움이 밤낮으로 너를 베어 먹는다지. 돈으로 여자를 사거나 밤새 술을 마시거나 새로운 나라에서 일을 하게 되면 곧 버리게 될 일 년 만기의 여자 친구를 만드는 남자들에 대해 너는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하지. 외로워, 외로워서 죽겠어.
  아기는 자라고. 너는 휴식은 있지만 휴일이 없는 나라에서. 나는 휴일은 있지만 쉴 수 없는 오늘을 이야기하지.
 
  여기는 비가 내려. 그곳에서는 비처럼 흐르는 땀이 매순간 너를 오염시킨다지. 너는 다른 나라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욕을 퍼붓고, 아버지뻘 되는 그들 중 누군가의 뺨을 때리고, 이제 갓 성년이 된 어린 노동자들이 석면에서 뒹구는 것을 지켜봐야 한다고. 그들이 버는 것보다 열 배도 더 넘는 돈을 받는다고 상심하고 또 상심하지. 돈으로 여자를 사는 사람들을 이야기하고. 외로워, 외로워서 죽겠어. 너 역시 그 나라에서는 외국인 노동자일 뿐. 누구의 모국어도 아닌 외국의 말로 이야기를 나누겠지. 
  아기는 매일 자라고. 너는 그곳의 방식으로 날 협박하고 조롱하고. 나는 너를 모욕하는 현실의 편에서 이야기를 나누지.
 
  여기는 바람이 많이 불어. 그곳에서는 삭막한 사막의 석양을 사진으로 찍을 수도, 도시의 밤을 거닐 수도, 시를 쓰고 책을 읽을 수도 없다지. 너는 낯선 모든 것들에 힘들고 화가 나고. 원망할 사람이 필요하고. 안약도 없이 눈은 짓무르고. 연약한 온기는 갈 방향을 잃고. 외로워, 외로워서 죽겠어. 너는 울고 나를 때리겠다고 말하지. 다시는 보지 않을 사람처럼 내게 욕을 퍼붓고.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너를 감싸며 나를 사랑한다 말하지. 너는 울고. 다른 남자들처럼 욕을 하거나 함부로 아내를 때리지는 않겠다고 맹세하지.
  아기는 점점 예뻐지고. 여기 사람들은 그래, 남편이 무엇을 했건 아니라고 말하면 믿는 짐승이 아내라고. 지금 너는 같은 목소리를 내고 있을까. 내가 사랑한다고 답해도 너의 꿈은 돌아오지 않을 방향으로 마음을 틀겠지.
 
  여기는 계속되는 장마야. 나는 이곳에서 아내라는 기구처럼 작동하고 타이머가 끝날 때까지 먼지를 털며 널 기다리지. 하지만 네가 사랑한다던 나는 먼지처럼 통화음 속으로 사라져버리고. 부자가 될 손금을 가졌다는 아기는 손금 가득 먼지를 끼고 잠이 들었지.
  아기는 잠을 자고. 너는 오늘도 어느 먼 미래의 행성을 오가며 내게 울면서 전화를 하지. 보고 싶어. 보고 싶어 죽겠어. 네가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너는 누구에게 이야기를 하는 걸까. 우리는 내가 아님에도 나의 모습을 가진 네가 미치도록 보고 싶었고, 서로가 모르는 공간에서 모르는 채로 죽어버리길 간절히 기원했다. 나는 장맛비 속에 유실된 나의 이야기를 찾아, 긴 잠에 든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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