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런 날이면 언제나
이상하기도 하지, 나는 
어느새 처음 보는 푸른 저녁을 걷고
있는 것이다, 검고 마른 나무들
아래로 제각기 다른 얼굴들을 한
사람들은 무엇엔가 열중하며
걸어오고 있는 것이다, 혹은 좁은 낭하를 지나
이상하기도 하지, 가벼운 구름들같이 
서로를 통과해가는

 


나는 그것을 예감이라 부른다, 모든 움직임은 홀연히 정지
하고, 거리는 일순간 정적에 휩싸이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숨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그런 때를 조심해야 한다, 진공 속에서 진자는 
곧,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검은 외투를 입은 그 사람들은 다시 저 아래로
태연히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조금씩 흔들리는 
것은 무방하지 않은가
나는 그것을 본다

 


모랫더미 위에 몇몇 사내가 앉아 있다, 한 사내가
조심스럽게 얼굴을 쓰다듬어본다
공기는 푸른 유리병, 그러나
어둠이 내리면 곧 투명해질 것이다, 대기는
그 속에 둥글고 빈 통로를 얼마나 무수히 감추고 있는가!
누군가 천천히 속삭인다, 여보게
우리의 생활이란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가
세상은 얼마나 많은 법칙들을 숨기고 있는가
나는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그러나 느낌은 구체적으로
언제나 뒤늦게 온다, 아무리 빠른 예감이라도
이미 늦은 것이다 이미
그곳에는 아무도 없다


2

가장 짧은 침묵 속에서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결정들을 한꺼번에 내리는 것일까
나는 까닭 없이 고개를 갸우뚱해본다
둥글게 무릎을 기운 차가운 나무들, 혹은
곧 유리창을 쏟아버릴 것 같은 검은 건물들 사이를 지나
낮은 소리들을 주고받으며
사람들은 걸어오는 것이다
몇몇은 딱딱해 보이는 모자를 썼다
이상하기도 하지, 가벼운 구름들같이
서로를 통과해가는
나는 그것을 습관이라 부른다, 또다시 모든 움직임은 홀연히 정지
하고, 거리는 일순간 정적에 휩싸이는 것이다, 그러나
안심하라, 감각이여!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검은 외투를 입은 그 사람들은 다시 저 아래로
태연히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어느 투명한 저녁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모든 신비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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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2

이제니, 흐른다

2021. 8. 31. 19:17



하늘은 먹구름이다. 나무는 그림자다. 공은 허공에 떠 있다. 너는 의자에 앉아 있다. 바닥에 닿기 직전이다. 나무가 되기 직전이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고백이 흐른다. 위에서 아래로. 꽃잎이 떨어진다. 이제 무엇이 오면 좋을까요. 물이 오면 좋겠어요. 말이 오면 좋겠어요. 말라가고 있었거든요. 죽어가고 있었거든요. 분수대 뒤에서 울고 있는 것은 낯모르는 아이. 여름으로 향하는 것은 잎사귀와 열매. 고백이 흐른다. 너에게서 나에게로. 겹으로 흐른다. 어제에서 오늘로. 너는 떨어진 꽃을 주워 꽃잎 점을 친다. 하나 둘. 하나 둘. 바닥에는 분필로 그린 사람이 있다. 누워 있는 사람 곁으로 공이 떨어진다. 떨어진 공 곁으로 꽃잎이 떨어진다. 흐르는 공 곁으로 꽃잎이 흐른다. 이제 무엇이 있으면 좋을까요. 연필이 있으면 좋겠어요. 지우개가 있으면 좋겠어요. 쓰고 싶어졌거든요. 지우고 싶어졌거든요. 제대로 처음처럼 만나고 싶어졌거든요. 마지막을 마지막으로 걷고 싶어졌거든요. 영원히 나아가는 먹구름이다. 푸른색이 열리는 하늘이다. 이제 무엇을 하면 좋을까요. 건너가면 좋겠어요. 넘어가면 좋겠어요. 울고 싶어졌거든요. 살고 싶어졌거든요. 그림자가 지워지는 바닥이다. 흐르는 공 너머로 다시 오는 여름이다. 고백이 흐른다. 열리지 않는 입속에서. 보이지 않는 눈 속으로. 고백이 흐른다. 하나의 그림자에서 또 다른 그림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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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2

기형도, 진눈깨비

2021. 8. 28. 02:03




때마침 진눈깨비 흩날린다
코트 주머니 속에서는 딱딱한 손이 들어 있다
저 눈발은 내가 모르는 거리를 저벅거리며
여태껏 내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사내들과 건물들 사이를 헤맬 것이다
눈길 위로 사각의 서류 봉투가 떨어진다, 허리를 나는 굽히다 말고
생각한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참 많은 각오를 했었다
내린다 진눈깨비, 놀랄 것 없다, 변덕이 심한 다리여
이런 귀가길은 어떤 소설에선가 읽은 적이 있다
구두 밑창으로 여러 번 불러낸 추억들이 밟히고
어두운 골목길엔 불켜진 빈 트럭이 정거해 있다
취한 사내들이 쓰러진다, 생각난다 진눈깨비 뿌리던 날
하루종일 버스를 탔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낡고 흰 담벼락 근처에 모여 사람들이 눈을 턴다
진눈깨비 쏟아진다, 갑자기 눈물이 흐른다, 나는 불행하다
이런 것은 아니었다, 나의 일생 몫의 경험을 다했다, 진눈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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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새들이 떨어지는 걸까 떨어지면서 죽는 걸까 멈춘 새의 심장이 맥박을 타고 흔들린다 작은 벌레들을 먹고 또 먹고 죽은 새, 새의 부리 새의 발톱 아직 단단한 것들 금이 간 눈동자 금이 간 날개 쪼개진 틈으로 빛이 스민다 그걸 따라 벌레들 기어들어간다

 

반은 따뜻하고 반은 차갑고 반은 가득차고 반은 텅 비어 얼마나 기쁘고 얼마나 슬픈지, 불안도 맞고 확신도 맞다 어두운 곳과 조금 더 어두운 곳이 남았다 미치도록 궁금했으나 이제 거의 분명해졌다 끔찍했다고 할까 아름다웠다고 할까 어디에서도 오지 않았고 아무것도 되지 않았다

손가락질을 할 때마다 손가락으로 변해갔다 침을 뱉을 때마다 침으로 변해갔다 틀렸다 틀려먹었다 덜 마른 악취들도 곰팡이들도 피어난다 너와도 피었던가 아니, 아닌 사람들, 얼굴은 거미줄로 뒤덮여 가끔씩 깨어나면서 소리는 지르지 않으면서 귀는 막지 않으면서 찌르는 목소리와 감싸안는 목소리가 동시라니 믿을 수 없는데 믿지 않을 수도 없다니

조롱과 통증 사이 길게 자라는 손톱으로 긁으며 나의 다리를 베고 누운 나의 얼굴 나의 눈을 들여다보는 나의 얼굴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처럼 서늘하다 죽은 것들로 몸을 채웠을 것이다 삼킬 수 없는 것들을 삼켰을 것이다 양 손바닥에 눈동자를 그려넣은 적 있다 목도하려고 잊지 않으려고, 그래놓고는 주먹을 꽉 쥐고 시작을 되풀이한다 주먹을 감싸 쥔 눈이 아프다 너무 많이 박힌 금단들

언젠가의 밤과 어젯밤과 마지막의 밤까지 내가 너야 네가 나야, 안다 알고 있다 알고 있다는 것을 안다 어제와 내일이 금간 틈으로 빛이 새어나온다 그리로 기어들어간다 안녕, 또 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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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를 꿈꾸진 않았어요. 잃어버린 삶이 있다는 걸 이제는 알죠. 부족한 것들로만 채워진 결핍도 순수할 수 있다는 걸. 아름다운 것도 아플 수 있죠. 부끄러운 얼굴로 더러워지는 삶을 살아가야 해요. 참을 수 있는 것들은 언제나 흉측하죠. 참을 수 없이 아름다운 것들을 꿈꾸진 않았어요. 다만 너와 내가 있는 풍경, 멈춰버린 삶이 있다는 걸 이제는 알죠. 불청객처럼 찾아들어 손님이 되거나 외로운 얼굴들. 둘로 갈라지는 게 더 평화로운. 아름다운 것들은 끔찍해요. 삶은 결코 추악해질 수 없죠. 다만 너와 내가 있는 무덤. 막막한 것들이 가슴을 먹먹하게 하고. 죽음보다 거친 고백. 당신이 내 삶에 뛰어들었을 때 나는 상처 입었어요. 우리는 안녕. 차라리 안녕을 꿈꾸죠. 영원히 아름다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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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심었다던 작약이 밤을 타고 굼실거리며 피어나, 그게 언제 피는 꽃인지도 모르면서 이제 여름이라 생각하고, 네게 마당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면서 그게 아니면, 화분에다 심었는지 그 화분이 어떻게 허연빛을 떨어뜨리는지 아는 것도 없으면서 네가 심은 작약이 어둠을 끌고 와 발아래서 머리 쪽으로 다시 코로 숨으로 번지며 입에서 피어나고, 둥근 것들은 왜 그리 환한지 그게 아니면 지금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가르쳐주지도 않으면서, 봄은 이렇게 지나고 다시 여름이구나 몸을 벽에 붙여보는 것이다 그러니 작약이라니 나는 그게 어떻게 생긴 꽃인지도 모르고 나도 아니고 너는 더구나 아닌 그 식물의 이름이 둥그렇게 떠올라 나는 네가 심었다는 그것이 몹시 궁금하고 또 그런 작약이 마냥 지겨운 건 무슨 까닭인지 심고 두 손을 소리 내어 털었을 네가, 그 꽃이, 심었다던 작약이 징그럽게 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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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은영, 나는

2021. 5. 10. 00:00

 

너무삶은 시금치, 빨다 버린 막대사탕, 나는 촌충으로 둘둘 말린 집, 부러진 가위, 가짜 석유를 파는 주유소, 도마 위에 흩어진 생선비늘, 계속 회전하는 나침반, 나는 썩은 과일 도둑, 오래도록 오지 않는 잠, 밀가루 포대 속에 집어넣은 젖은 손, 외다리 남자의 부러진 목발, 노란 풍선 꼭지, 어느 입술이 닿던 날 너무 부풀어올랐다 찢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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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있어요 거울이 있어요 겨울의 거울이 좋아요 좋은 게 좋아요 좋아하는 게 좋아요  좋아지는 게 좋아요 조금씩 자꾸자꾸 더해지는 게 좋아요 아주 추워 아무도 지나지 않는 거리가 좋아요 아무도, 그거 좋아요 막막한 거리(距離)가 좋아요 창가의 차가운 손가락들 기를 쓰고 달라붙는 입술과 뾰족해지는 물방울들이 좋아요 내일은 더 춥고 모래는 더더욱 춥고 날마다 더해지는 거 좋아요 얼음 속의 빛, 결빙된 순간들 순정한 입자들 무한한 인칭들 안녕을 묻고 답하기도 전에 얼어붙는 당신의 눈빛은 물기 어린 어린 생의 것, 수면 깊이 요동치는 밭은 숨은 두려워지는데 겨울 속의 거울 속에 또 눈이 내려요 눈송이 속의 눈동자들은 세상을 다 보았을까요 피는 묽어졌을까요 점점 느리게 흘렀을까요 눈에 눈이 멀 듯 마음에 마음이 멀어요 멀게 되면 멀어집니다 먼 하늘의 새들이 떨어집니다 눈송이 같아요 꽃잎 같아요 찻잎 같아요 빵 부스러기 같아요, 같은 게 좋아요 번지니까 끌어당기니까 그래도 불가능해 미련한 영원이 되니까 좋아요, 거짓말! 새가 맞습니까 가진 적 없는 것에 슬퍼질 수 있나요 가진 적 없는 것을 잃을 수도 있나요 기억나지 않는 기억도 있나요 우리는 서로를 모르고 있나요 예, 혹은 아니요 하지만 겨울을 알면 겨울을 보게 됩니다 거울을 알면 거울을 보게 됩니다 그렇게 바라본다 해도 변해갑니다 바라보는데도 사라지게됩니다 그러니 지금은 곁에 있어요 영원히 영원은 아니니까요,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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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겨울, 또 거울. 거울 속의 나는 거울 밖에 있고 어제로부터 병이며 기질을 상속받을 운명이라면, 오늘은 당신이 내일은 내가 혹은 순서를 바꾸어 사라질 운명이라면. 그게 다라면. 영원히 너를 사랑해, 고백할 때 이미 세 번의 거짓말. 그래도 사랑해. 사랑한다고 말하면 우리는 이제 무엇이 될까요. 언젠가 당신에게 당신을 돌려보낼 때 아니, 아무도 아니, 불안정의 대기, 어지러운 숨. 오래전 꿈에서 당신을 향해 걸어 여기까지 왔어요. 고단한 허기는 알리오 올리오 파스타 면은 끓는 물에 7분. 최선을 다해 나른하고 촉촉해진 이것을 드시며 말해주세요. 응. 그래. 그랬구나. 고개를 끄덕여주세요. 가능한 것이라고는 의문문과 과거시제뿐이라해도 기꺼이 삼키는 것이 우리들의 오늘의 영원이라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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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2

허연, 거진

2021. 4. 29. 00:01

 

당신이 사라진 주홍빛 바다에서 갈매기 떼 울음이 파도와 함께 밀려가선 오지 않는다. 막 비추기 시작한 등대의 약한 불빛이 훑듯이 나를 지워버리고 파도 소리는 점점 밤의 전부가 됐다. 밤이 분명한데도 밤은 어디론가 가버렸고 파도만이 남았다. 밤은 그렇게 파도만을 남겼다. 당신을 기다리는 시간 내내 파도 위로 가끔 별똥이 떨어졌다. 바스락거리던 조개들의 죽음이 잠시 빛났고 이내 파도에 묻혔다 소식은 없었다. 밤에 생긴 상처는 오래 사라지지 않는다. 도망치치 못했다 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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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2

유희경, 그해 겨울

2021. 4. 28. 00:44

 

 

그해 겨울 오랜 연애를 마감하였고 파란 사파리 점퍼를 사서 계절이 다 닳도록 입었다 즐겨 들었던 노래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몇 갑의 담배를 피웠고 끊을 수가 없었다 떨지 않았다 그냥 아무렇지도 않았던 그해 겨울,

많은 사람이 죽었다 이따금 전광판을 바라봤지만 나는 소식이 되지 않았다 이따금 生은 괜찮았다 이따금 새가 날았다 이따금 아는 사람을 만났고 명함을 주고받았다 어디든 나는 나이를 둘러매고 갔다 췌장을 앓았다 받아온 약은 먹지 않았다 그렇게 또 한 해가 지나가고 있었다

나무들은 멈추었다 겨울에 대해 쓰고 싶었지만 쓰지 못했다 다 필요 없어 보이기만 했으니, 만져보았던 글자들이 몸을 떨었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늙은 개들은 언덕을 따라 올라가고 아이들은 여전히 달리기를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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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혜은, 우리

2021. 4. 28. 00:38

 

 

암호로 되어 있었다. 우리는 우리의 아무것도 믿지 않아. 나는 다리가 꺾인 짐승처럼 빙 돌아와 말했다. 아 파 요. 간격을 두고 마디마다. 몸이 찢어진 벌레들 위에 누운 언니는 숨겨진 것들의 작은 아픔을 욕망헀고, 핀셋을 들어 관찰했다. 때때로 나는 공포를 가지지 못한 사람처럼 나의 내장에 기생하는 벌레들을 상상했다. 우리는 무력함에 대해 생각했다. 나의 욕망은 너의 아픔보다 중요한 일일까. 너와 나는 우리를 자세히 훼손했다.

눈물이 많아요. 노래하고 춤추고 연기하고 배경이 되고 단역이 되고. 어두운 커튼으로 내려앉아 불빛으로 새어 나가고. 우리는 날 속에 쳐진 얇은 막이 눈치채지 못하게. 우리는 서로를 파괴할 때 더 사랑해요. 우리의 사랑은 얼마나 얇고 견고하고 위태롭고 많은 단어의 색을 가졌는지 모릅니다. 나는 파괴될 때 더 아름다웠고, 우리의 사랑은 충분히 병들어 있었다.

모두 별을 쫓아 밤이 되길 기원했다. 그는 한가지 꼭 원하는 것이 있어 삶이 무거웠고, 나는 원하지 않는 것이 있어 삶이 무서웠다. 그는 매일 밤마다 꿈이 자신의 모든 것이라고 말했지만, 나는 그 어떤 것도 모든 것은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사랑해. 나는 우리가 굶주림에 지쳐 서로를 뜯어 먹고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앓았다. 나의 한쪽이 무섭게 병들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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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태어났어
추워, 라고 말하면 정말 추워서 이 세상을 떠도는 모든 먼지들을 모아 옷을 만들어 입고 싶었지
태어났을 뿐이었어, 누군가 나를 자라게 했어 

 


아직 꽃술을 열어보지 못한 꽃들이 성교를 하느라 바쁜 들판에 누워
아직 단 한 번도 새끼를 낳아보지 않은 새들이 지나가는 것을 보며
나비에게도 잠자리에게도 덜 익은 빛을 보여줘, 라고 공기에게 말했던 적도 있었어
나와 자연은 사실혼 관계
법정에서는 서로에 대해 아무 권리가 없다는 걸 늦게사 알았지
나에게 말을 거는 저 암소가 일찍이 나에게 수유를 한 어머니라는 걸
당신이 알았으면 좋겠어


매일 어디론가 사라졌다 다시 나타나는
하늘에 있는 공들에게도 내 수유의 어머니,
그 고깃덩어리가 걸린 정육점을 단 한 번이라도 보여주었으면 했어
공들은 내가 인간이라는 걸 알까? 인간을 수유하는 암소들을 생산하는
더러운 거리 구석에 있는 도살장을 알까,
저것 봐, 아이가 불어대는 풍선 어떤 포유류의 방광이 하늘로 가서
먼 들판을 은은하게 비추어대는 하늘의 공이 되네


시간을 잘라 만든 혁대를 목에 감고 죽은 테러리스트가 살던 감방 안에서 자라던 작은 백합의 뿌리는 세계를 버티는 나무처럼 테러의 주검을 견뎌내고 있었어
아주 어린 중세가 대륙 저편에서 현대처럼 활개를 치고 있네, 그 말을 듣기 위해 춤을 추러 가는 아이들에게
나, 태어났어, 라고 말해봐, 말해봐
아이들이 당나귀처럼 웃으며 내 얼굴에다 총을 들이댈 거야


피가 솟구치는 숨겨진 샘이 있다라거나
죽을 수 없는 인간들이 매일매일 전쟁을 한다거나
그리고 당신이 날 사랑한다거나
그리고 그리고 그 말을 내가 믿는다거나 하는
엄숙하게 웃기는 나날 동안


나, 태어났어
아퍼, 라고 말하면 너무나 아파서 이 세상의 밤을 떠도는 모든 안개를 엮어 붕대를 만들고 싶었지
안개붕대를 감고 누워 컴컴하게 웃고 있었으면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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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이 있더라니 구부러진 뒤에야 밝은 줄 알았다 귀를 대고 한참 서 있었다 그저 아득하기만 한 그런 밤 이었다 누가 손등을 대고 까맣도록 칠해 놓은 그런

앉았다가 떠난 자리를 꽃이라 부르고 많은 것들을 보여 주고 싶었던 그래, 누가 흔들고 지나간 것들을 모아 그늘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러니 꽃이 다 그늘일 수밖에

있었던 말들을 놓아주었더니 스르륵 눈이 잠겼다

감고 싶었다 그랬다고 손목을 놓아주는 건 아니었을 텐데 스르륵 소리가 나고 눈을 감았다

그것도 소원이라고 휘청거리는 바람이 피었다 아무리 잡아도 허공이었다 허공에 대고, 울어놓은 자리마다 흔적이 생겼다 그 자리는 건들지 않았다 꺾을 힘마저 놓아버렸다

 

* 이역만리 먼곳까지 시집 한권을 사들고 온 이장숙에게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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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2

박서영, 달의 왈츠

2021. 1. 11. 02:09

  당신을 사랑할 때 그 불안이 내겐 평화였다. 달빛 알레르기에 걸려 온몸이 아픈 평화였다. 당신과 싸울 때 그 싸움이 내겐 평화였다. 산산조각 나버린 심장. 달은 그 파편 중의 일부다. 오늘밤 달은 나를 만나러 오는 당신의 얼굴 같고. 마음을 열려고 애쓰는 사람 같고. 마음을 닫으려고 애쓰는 당신 같기도 해. 밥을 떠 넣는 당신의 입이 하품하는 것처럼 보인 날에는 키스와 하품의 차이에 대해 생각하였지. 우리는 다른 계절로 이주한 토끼처럼 추웠지만 털가죽을 벗겨 서로의 몸을 덮어주진 않았다. 내가 울면 두 손을 가만히 무릎에 올려놓고 침묵하던 토끼. 

  당신이 화를 낼 때 그 목소리가 내겐 평화였다. 달빛은 꽃의 구덩이 속으로 쏟아진다. 꽃가루는 시간의 구덩이가 밀어 올리는 기억이다. 내 얼굴을 뒤덮고 있는 꽃가루. 그림자여, 조금만 더 멀리 떨어져서 따라와 줄래? 오늘은 달을 안고 빙글빙글 돌고 싶구나. 돌멩이 하나를 안고 춤추고 싶구나. 그림자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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