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로 전이된 악성종양으로 견고한 철자법의 세계에서 풀려난 당신은 운동장을 돌고 또 돌았습니다 당신의 마지막 편지는 그렇게 숨을 헐떡이고 있었습니다 더 이상 뛰지 못하고 저 하늘 위에 걸려 있는 싸구려 흰 운동화는 이제 비에도 젖질 않습니다
 
당신이 내 손을 잡고 싶어 했을 때 난 책장을 넘기고 있었습니다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못했습니다 당신이 가신 후 보는 책 족족 밑줄을 그었을 뿐입니다 이제 당신 차례입니다 내 온몸에 밑줄을 그어주세요 그 계단을 밟고 내려와 내 손을 잡아주세요
 
한 달 내내 보던 두꺼운 책을 찢어 버렸습니다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들지 못하다 결국 찢어진 책장을 한 장씩 한 장씩 스카치테이프로 붙였습니다 찢어진 밑줄이 너덜너덜한 밑줄이 되고 너덜너덜한 미로가 됩니다
 
미로 속에 갇힌 채 시계추처럼 똑 딱 똑 딱 흔들리는 내 몸이 나를 몇 번이나 돌려놔도 시계 바늘은 그 자리 그대로인데 한 줌의 재로 사라진 시간 위로 망가진 자음과 모음이 꽃비 되어 나리는 또, 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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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니, 창문 사람

2019. 9. 11. 20:01



나는 그쪽을 보지 않으려고 했다. 그래서 그쪽을 보고 말았다. 너는 이쪽을 보려고 했다. 그래서 이쪽을 볼 수 없었다. 창문이 하나 있고 조금 그립습니다. 그러나 나는 울지 않는 사람이니까 거리를 달리면서 휘파람을 불었다. 너는 창문 밖에 서 있는 사람. 한번 창문 사람이면 영원한 창문 사람이다. 카렌다 레코다 기카이다. 도케이 시케이 만포케이. 메이레이 시레이 한레이. 기어이 운율을 맞추고야 마는 슬픈 버릇. 너는 배려하지 않는 사람이 좋다고 말했다. 나는 조금도 배려하지 않는다. 슬픔은 아무도 달래줄 수 없을 때에 진정 아름다운 법이지요. 나는 울지 않는 사람이니까 거리를 달리면서 휘파람을 불었다. 휘파람을 불 줄 몰랐지만 쉬지 않고 휘파람을 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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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영, 열흘나비

2019. 9. 11. 20:00




너는 나비처럼 웃는다. 웃는 입가가 나비의 날갯짓 같다. 열흘쯤 웃다보면 어느 생에서 어느 생으로 가는 지 잊어버린다. 너를 반경으로 빙빙 도는 사랑처럼 나비는 날 수 있는 신성을 갖고 있다. 아무도 찾지 못할 산속으로 날아가는 나비를 본 적이 있다. 죽음을 보이기 싫어하는 습관 때문이다.


너는 나비처럼 운다. 여름 끝자락에서 열흘을 다 산 것이다. 나는 너를 보기 위하여 산으로 가는데 가을이 먼저 오고 있다. 너에게 생은 채우지 못하여도 열흘, 훌쩍 넘겨도 열흘이다.


한 번 본 너를 붙잡기 위하여 나는 찰나를 산다. 열망을 향해 날아가는 너를 잡을 수 있는 날이 열흘뿐이나 나는 그 시간 밖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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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연, 선고

2019. 9. 3. 18:42


너는 잠에서 나오지 않는다

나는 너의 감긴 눈꺼풀을 열고
눈보라 치는 설원을 바라본다

모든 악몽 위에 세워진
고요의 땅

그곳으로
너를 찾으러 간다

한방울 그리고 한방울
핏방울을 떨어뜨리며

펄럭이는 심장을 들고
너를 찾아 한참을 헤맨다

이토록 추운 잠 속에서
너는 혼자 얼마나 무서웠을까

간혹 바람만이 얼굴을 헤집고 돌아갈 뿐
어디에도 너는 보이지 않는다

나는 점점 희박해지는 숨을
몰아쉬며

서로를 끌어안으려다
목을 조르며 죽어간 두그루
나무를 떠올리고

먼지로 뒤덮인 피아노 덮개를 열듯
하나하나
용서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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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해부극장 2

2019. 8. 30. 06:14


나에게
혀와 입술이 있다.
 
그걸 견디기 어려울 때가 있다.
 
견딜 수 없다, 내가
 
안녕,
이라고 말하고
어떻게 생각하세요,
라고 말하고
정말이에요,
라고 대답할 때
 
구불구불 휘어진 혀가
내 입천장에
매끄러운 이의 뒷면에
닿을 때
닿았다 떨어질 때
 
                                             *
 
그러니까 내 말은,
안녕.
어떻게  생각하세요.
           진심이야.
           후회하고 있어.
           이제는 아무것도 믿고 있지 않아.
 
                                                   *
 
나에게
심장이 있다,
통증을 모르는
차가운 머리카락과 손톱들이 있다.
 
그걸 견디기 어려울 때가 있다
 
나에게 붉은 것이 있다, 라고
견디며 말한다
일 초마다 오므렸다 활짝 펼치는 것,
일 초마다 한 주먹씩 더운 피를 뿜어내는 것이 있다
 
                                              *
 
수년 전 접질렸던 발목에
새로 염증이 생겨
걸음마다 조용히 불탈 때가 있다
 
그보다 오래전
교통사고로 다친 무릎이
마룻장처럼 삐걱일 때가 있다
 
그보다 더 오래전 으스러졌던 손목이
손가락 관절들이
다정하게
고통에 찬 말을 걸어온다
 
                                             *   
 
그러나 늦은 봄 어느 오후
검푸른 뢴트겐 사진에 담긴 나는
그리 키가 크지 않은 해골
살갗이 없으니
물론 야위었고
역삼각형의 골반 안쪽은 텅 비어 있다
엉치뼈 위의 디스크 하나가
초승달처럼 곱게,  조금 닳아 있다
 
썩지 않을,
영원히 멈춰 있는
섬세한 잔뼈들
 
뻥 뚫린 비강과 동공이
곰곰이 내 얼굴을 마주 본다
혀도 입술도 없이
어떤 붉은 것, 더운 것도 없이
 
                               *
 
몸속에 맑게 고였던 것들이
뙤약볕에 마르는 날이 간다
끈적끈적한 것
비통한 것까지
함께 바싹 말라 가벼워지는 날
 
겨우 따뜻한 내 육체를
메스로 가른다 해도
꿈틀거리는 무엇도 들여다볼 수 없을
 
다만 해가 있는 쪽을 향해 눈을 잠그고
주황색 허공에
생명, 생명이라고 써야 하는 날
 
혀가 없는 말이어서
지워지지도 않을 그 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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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숙, 기도

2019. 8. 29. 10:05




만약 영혼이라는 게 있다면, 
(있는 것 같다, 이렇게 
걷잡을 수 없이 가슴이 쓰리고 아플 때면) 
내 영혼은 분명 
금이 가 있을 것이다. 
격통 속에서만 나는 내 영혼을 느낀다. 
금이 간 영혼을. 



내가 태어난 하늘엔 태양이 없는데 
나는 하염없이 햇빛 속에 뒹굴기를 원한다. 
태양의 인간이 아니면서 
그 맛을 알고, 탐하다; 
이것이 망조다. 



하느님, 우리를 힘들게 마옵소서. 
정 힘들게 해야 되겠거든 
그 힘듦을 감당할 
힘을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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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대, 해적방송

2019. 8. 25. 20:53

긴 방파제를 따라 파도가 치지 


파도에 밀려 저녁이 오면 나는 이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방송을 시작해


당신은 듣고 있을까, 오로지 당신을 위해, 긴긴 말레콘을 따라가며 부서지는 파도치는 말레콘 해적 방송


영화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을 보면 「찬찬」이라는 음악과 함께 파도치는 말레콘의 풍경이 나오지


그런 말레콘을 따라 오래도록 당신과 함께 걷고 싶었어


아바나의 밤하늘엔 노란색 별들이 떠 있고 우리는 가난한 건물들 사이를 아무 걱정도 없이 걸어가겠지


베로니카, 삶이 가난한 것은 건물들 때문이 아니야


우리는 지금 저녁의 한적한 카페에 들어가 한 잔의 술을 마실 수도 있고 말레콘에 부서지는 파도의 음악 소리를 들을 수도 있잖아


거리에는 가난한 악사들이 그들의 영혼을 연주하지


선풍기가 없어도 밤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우리의 가슴을 식혀줘, 겨울에도 우리는 춥지 않아, 베로니카, 당신의 따스한 가슴에 묻혀 잠들 수 있으니까


저녁이 오면 낡고 오래된 말레콘에 앉아서 지나간 혁명이 찬란했다고 말하지는 말자, 삶은 결국 지나갈 테니까, 지나간 삶은 그래서 찬란할 테니까


베로니카, 아직 따스한 내 손을 잡아줘, 당신 안에서 찬란하게 빛나던 나를, 나의 혁명을 추억이라고 말하지 말아줘


아직 내 마음의 말레콘에는 파도가 치고 별빛이 빛나고, 당신과 나는 작은 손전등 하나를 들고도 우리의 낡은 침낭 속으로 스며들 수 있으니까


침낭 속에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것을 볼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베로니카, 우리는 세상을 버리고 그냥 우리에게 망명해버리자


나는 지금부터 당신의 말레콘이야


카리브 해의 파도를 음악으로 바꿔 밤새도록 당신을 위한 단 하나의 해적 방송을 할 테야


당신만 들어주면 돼, 그러면 돼, 나는 밤새도록 당신의 귓가에서 파도치며 출렁일 테니 당신만이 꿈의 주파수로 날 들어주면 돼


베로니카 그러니까 기억해야 해, 꿈속에서도 잊으면 안 돼


사랑해, 그래 여기는 파도치는 말레콘 해적 방송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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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은선, 종이배 호수

2019. 8. 23. 22:36


1
 
나와 너는 커다란 유리 아래 누워 구름과 불더미를 봐.
너는 감은 눈. 너는 다른 빛 속에서 기울어지고 있어.
 
나는 슬픈 이야기를 하려고 했어 실은. 너무 슬퍼서 있지도 않은 것 같은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 그런데 자꾸 구름만 봤어. 어째서 세상은 이 따위고, 어째서 새나 강물 같은 것을 보며 평화롭다고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어서. 그냥, 하고 생각하니까. 슬픈 마음을 슬프다고 하는 것도 허락되지 않는 것 같아서, 낮아지고 있어.
 
손을 잡으면 차갑고 따듯하고 초록을 흔들고. 복도 끝으로 공을 따라 여자아이가 달려가고. 그런데 낯설고 몇만 번이나 겪은 것처럼 땅이 물컹이고. 사람들은 액체를 나눠 마시고. 오토바이가 지나가. 나는 그것이 슬픈가 하고 물었어. 그런데 그건 아무것도 아닌 거고. 웃음소리가 귓속에서부터 시작되어서. 수족관을 떠올렸어. 아주아주 크고 깊은 불이라고 생각했어.
 
너는 깜박이는 눈, 너는 다른 그림자 속에서 일어서고 있어.
유리절벽과 유리절벽 아래 최초의 인간이 웃고 있어.
 
 
2
 
처음은 거대하고 처음은 말이 없다.
노를 젓는 사람이 땀을 흘린다.
너는 여기가 처음이지? 그치?
단내가 나는 과일을 반으로 가르자
즙이 팔뚝을 타고 뚝뚝 떨어진다.
외국어처럼, 편하고 낯선 얼굴.
불 속에 갇혀 있는 얼굴.
 
노래를 할 줄 안다면 불러줄 텐데.
작고 파란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우리는 눈 속에 누워 있다.
우리는 눈 속에서 기다린다.
 
 
3
 
좁은 터널 끝에서 빛이 쏟아져 들어와. 우우우, 하고 알 수 없는 말이 말 이전의 말이 유리 아래서 둥글게 울려 퍼지고, 그런데 웃음은 이상해. 이상해서. 어항을 뒤집어쓴 얼굴이 차례로 넘어진다고 했어. 이건 어디에서 끝나는 그림일까 끝도 없이 화가는 온몸을 휘두르고 있어? 빛이 있다고 하면 빛이 생겨나고 네 손을 잡는다고 말하면 네가 나를 끌어안는······ 초록들이 초록들을 흡수하는 그림일까. 가장 뜨거운 것이 가장 뜨거워서 느낄 수도 없는 온도를 가질 때.
 
영영 누워 있는 사람을, 벌떡 일어나 사라지는 불의 그림자를, 나는 구름이라고 생각했어. 사라진 나라의 왕들을 한 명씩 불러내 가르쳤어. 몸이 포개지고, 하늘은 무척 어두웠어. 처음과 끝이 동일하다는 것. 이어져 있다는 것. 왕들은 왕비를 찾기로 결의하지. 조각난 몸의 완전한 부분만 모아 다시 하나의 땅을 만들기로 해.
 
 
4
 
물의 몸과 같아.
꾹 다문 네 입술은 소리를 몰라.
 
신과 닮은 형상의 짐승들이 유리를 두들길 때. 지연된 것들을 다시 호명할 때. 그런데 우리가 꿈꾸었던 물과 불의 역사가 단지 구름이라니. 평화나 사랑, 그런 것을 슬프다고 할 수 있어? 다리를 저는 사람이 여자아이에게 비키라고 소리 지를 때. 공은 멀리 굴러가고, 오토바이가 빵, 공을 치고 지나갈 때.
 
너는 다른 빛의 시작.
너는 부릅뜬 눈.
눈 내리는 날의 말. 눈부신 초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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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연, 굴뚝의 기분

2019. 8. 23. 18:58



너는 꽃병을 집어던진다

그것이

망가질 대로 망가진 네 삶이라는 듯이


정오

너는 주저앉고

보란 듯이 태양은 타오른다


너는 모든 것이 너를 조롱하고 있다고 느낀다

의자가 놓여 있는 방식

달력의 속도

못 하나를 잘못 박아서 벽 전체가 엉망이 됐다고


그러거나 말거나

너의 늙은 개는 집요하게 벽을 긁고 있다


거긴 아무것도 없어

칼을 깎는 사과는 없어

찌르면 찌르는 대로

도려내면 도려내는 대로


우리는 살아가야 하고

얼굴은 빗금 투성이가 되겠지

돌이켜보면 주저앉는 것도 지겨워서

너는 어둠 위에 어둠을 껴입고

괜찮아, 괜찮아, 늙은 개를 타일러

새 꽃병을 사러 간다


깨어진 꽃병이 가장 찬란했다는 것을 모르고

심장에 기억의 파편이

빼곡히 박힌 줄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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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진, 나쁜 너

2019. 8. 18. 01:08
 
 너, 라고 발음하면 세상 모든 너는 '너' 에게 와서 갇힌다
 
 담배 연기 같은, 창틀의 먼지 같은, 깨진 유리 조각 같은, 커피 사탕 같은, 산마르코 광장에 고이는 바닷물 같은, 찰박찰박하는, 터질랑 말랑 하는, 목련 꽃잎에 내려앉은 봄햇살 같은, 새벽 복도에 혼자 앉아 있는 우유 팩 같은, 잘못 배달된 엽서 같은, 나비 날개 같은, 새벽 기도회가 열리는 교회 의자 같은, 자전거 페달 같은, 액자 위의 얼룩 같은, 비껴 앉은 사람의 옆열굴인, 귀밑을 스치는 바람결인,
 
 계절은 가을이고 이국의 노을 속에 흐르는 <수이사이드 이즈 페인리스>* 그리고 스위스산 오르골에서 흐르는 <러빙 유>
 
 할 수만 있다면 '러빙 유'를 당의정처럼 입고 너의 입속으로 들어가 삼켜지고 싶어, 나는 너의 내장 기관을 따라 흘러가다 너에게 흡수되어 너를 망쳐 놓고 싶어, 나는 심하게 훼손된 사람, 더 이상 가망 없는 봄날을 그리워하는 한심한 족속, 나는 나쁜 너에게 들어가 영원히 죽지 않는다
 
* 케런 앤의 노래 <Suicide is Painl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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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요, 우리는 언젠가 만난 적이 있어요. 시를 쓰는 여자여, 우리는 식탁에 앉아서 정치와 취향과 여름에 대해 이야기해요. 예의 바르고 말쑥한 손님의 자세로 당신은 물고기와 파란 정향의 냄새를 좋아하고 꼬리가 긴 바람도 좋아하지요.
나의 손님이여, 나는 당신의 존재를 덥석 베어 물고 싶군요. 뜨거운 혀로 당신의 표면을 어루만지고, 날카로운 이빨로 차가운 뼈와 뼛속에 감춘 권태의 쓴맛을 찢어발기고, 금박 씌운 둔중한 어금니를 동원하여 당신의 경악을 꼼꼼히 저작할 것입니다.
나는 생각해요. 흰 침을 뚝뚝 흘리는 입술, 검은 목구멍 속을 당신의 잔해를 꿀꺽 삼킨 혀가 자신의 유일한 임무를 마치고 어떤 흐느낌 속으로 돌아가는 순간을, 그곳의 어둡고 창백한 고요를, 언젠가 목구멍으로 툭 튀어나올 딱딱한 손가락을
그러나 시를 쓰는 여자여, 영원한 손님이여. 당신의 검은 심장은 곧 찢어지겠군요. 물고기와 정향을 좋아하는 당신, 새하얀 육체와 충만한 영혼을 가진 당신, 언제까지나 다정하고 따뜻하고 겸손한 당신, 어쩌면 아름다운 당신 그러나 곧 나에게 먹힐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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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경, 늙은 가수

2019. 8. 14. 06:17


나 오래 전 병아리를 키웠다네
이 놈이 닭이 되면 내버리려고
다 되면 버리는 재미
그게 바로 남창 아닌가, 아무데서나 무너져내리는 거

반짝이는 거
반짝이면서 슬픈 거
현 없이도 우는 거
인생을 너무 일찍 누설하여 시시쿠나
그게 바로 창녀 아닌가, 제 갈 길 너무 빤해 우는 거

닭은 왜 키우나 내버리려고
꽃은 피면 왜 다리를 벌리나 꽃에겐 씨앗의
꿈이란 없다네 아름다움에
뭐 꿈이 있을 턱이

돌아오고 싶니? 내 노래야
내 목젓이 꽃잎 열 듯 발개지던 그 시절
노래야, 시간 있니? 다시 돌아올 시간,
나 어느 모퉁이에서 운다네
나 버려진 거 같아 나한테마저도...

내일의 노래란 있는 것인가
정처없이 물으며 나 운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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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태어나기 전에도 사람들은 비틀린 목소리로 말하고, 휘어진 거울을 들고 다녔어 어떻게 해야 좋은 마음이 되는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잔재, 잔재들 긁어모으면 커지는 줄 아는 사람 눈물의 모양을 감춰둘 수 없어서 다 깨뜨렸다 거울이 바닥으로 쏟아졌다 자기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사람이 없었어 물살이 멈추지 않았다 발이 땅에 닿지 않았다 표정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눈앞에 있는데도 보이지 않는 빛 살아남자고 말하면서 흩어지는 잎 머뭇거리고 머뭇거리는 일 밖에서부터 안으로 목소리들이 들어온다 비워 두웠던 공간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슬픔에 익숙해지기 위해서 부드러움에 닿고자 하는 마음을 버렸다 잘못을 말하고 싶지 않아서 입을 닫아 버렸다 마른 꽃을 쌓아 두고 겨울이 오기를 기다린다 아주 작은 연함, 네가 태어나기도 전에



유월, 공원에 누워 공원을 바라본다

방안에 누워 방안을 바라보면서

안녕, 네 눈에 내가 보이길 바라지만

건조대에 마른 옷가지에선 네 살냄새만 난다

어제 입은 셔츠에 비누를 바른다

힘주어 잡으면 튀어오른다 부드러움은 죄다

그렇다


좋은 분 같아요, 발톱을 깎으며 좋은 사람의 마음이란 게

이 떨어진 톱처럼 손으로 모을 수 없는 두려움 같아서

뉴슈가를 넣고 달게 찐 옥수수 냄새에 틀니를 다시 깨무는

아버지, 나 어릴 적 푸푸푸 하모니카 소리에 왜 화내셨어요?

그때 왜 나를 나무라셨어요, 지금 그렇게 맛있게 드시면......

옥수수 하모니카 얘기는 그만두게 된다


구름에 네 손끝이 닿을 때마다 빨강거리며 하늘이 깨질 듯했다 쨍그랑,

이파리 부딪는 소리 몸 하나에 링거를 꽂고 세상을 다 뱉어내는 듯

비가 왔다 낮잠을 자고 꿈에서 누군가와 싸웠다

짐승의 털이라도 가진다면 웅덩이에 몸이라도 던지겠지만

젖은 베개를 털어 말리고 눅눅한 옷가지에 볼을 부비다 너의 아름다움이

온통 글이 될까봐 쓰다 만 편지를 세탁기에 넣고는 며칠을 묵혔다


당신이 기타와 피아노를 친다는 말을 듣고 몹시 기뻤어요

다친 사람을 위해 음악을 연주하고 치료하는 일이 꿈이라고 했지요

가능할지 모르겠다고, 엄마의 기타는 목이 휘었다고

하지만 기타는 계속 배울 거라고 마치 그 꿈을 살아본 사람처럼

차분했어요 그 고요한 수면 위에 몸 내릴 수 있는 새가 있을까?

나의 초라한 발견이 평범한 사람을 울리기 쉬운 새벽이면 틈틈이 편지를 썼어요


고백은 어째서 편지의 형식입니까? 파리한 나무 그늘 밑에서

빙빙 꼬리를 물고 돌아가는 개에게도 나는 묻게 된다

주저앉아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다시 태어나도 멈추지 않을 것 같아요,

그러자 아픈 일을 아름답게 말하는 건 좋은 일이 아닌 것 같다고

도무지 아름다운 것이 없는데 당신은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공원이었다 그렇더군요, 근데 걷고 좋았어요

왜 멀리 돌아왔느냐는 내게, 나를 궁금해해줘서 고맙다고 했다


공원에서 방안을 생각했다 방안에 누워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면

사람이 있구나, 안도했었지

멈춘 공은 죽은 공, 죽은 공은 멈춰 좋은가, 던지고 받는 벽 앞에서

멈춘 것들이 좋아져서 슬펐다

나를 슬프게 해줘서 좋았다고, 실은 편지를 썼어요

아무리 볼을 꼬집어도 살아지지 않는 사람에게

분명한 것은 우리가 사람이기를 조심스러워 해야 한다는 거겠죠

라는 말을 들었다


죽은 공처럼 누가 날 발로 차주었으면

들어가지 마시요 끝말이 틀린 경고문 안에서 우리는 튀어오르고

골대가 없는 농구장에서 던지는 연습을 했다 공을 주면 살아서

받아내려고 멈추지 않았다 누구의 공인지도 모른 채

죽으면 안 되니까, 산 것을 가만두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죽음이었다

text 2

장석주, 겨우

2019. 8. 2. 22:23



어둠은 깊다. 목이 마르다.

별들의 공전(空轉)이나 높새바람의 사생활을 들여다보는

내가 자꾸 목이 마른 것은

나무들의 생태(生態)와 닮은 몸— 사람이기 때문이다.

지표면의 물들 태반은 지하로 숨고

겨우 몸 안으로 들어온 물들이 순환하는 동안

나무들의 잎눈에서는 잔 근심과 후회들이

연초록으로 돋아난다.

비바람 따라 마실 나온 어린 천둥들이 우는 밤에는

잎들도 처절했다.

강제로 뜯겨 내동댕이쳐지는

그런 밤의 참혹에 증오의 미학도 깨치지 못하고

나는 굳게 대처하곤 했다.

조경선이 내려와 늦가을 무렵 연못은 완성되고

나는 위로를 받는다.

연못은 얕은 물로 단풍잎들을 받고

서리가 내렸다. 서리에 시드는 풀들,

노모의 잠꼬대 소리가 높아지는

동지 새벽에 깨어난 나는 겨우

은버들 한 쌍 같은 네 관자놀이와 쇄골을 더듬는다.

목이 마르고

목이 마른 밤들이 가고

네 마음 언저리에도 닿지 않는

네 푸른 정맥과 손목의 가냘픔을 사랑했음을 깨닫는다.

고요가 깊으면 그 고요 속에 숨결을 묻고

죽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태어나지 마라, 태중의 아이들아.

겨우, 라는 부사로써만 발설 될 수 있는

사랑이 있다면 그 사랑으로 무구한 개와 고양이들만

태어나라. 나는, 겨우, 살아 있으니까.

겨우, 사랑을 견딜 수 있을 뿐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