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로 전이된 악성종양으로 견고한 철자법의 세계에서 풀려난 당신은 운동장을 돌고 또 돌았습니다 당신의 마지막 편지는 그렇게 숨을 헐떡이고 있었습니다 더 이상 뛰지 못하고 저 하늘 위에 걸려 있는 싸구려 흰 운동화는 이제 비에도 젖질 않습니다
당신이 내 손을 잡고 싶어 했을 때 난 책장을 넘기고 있었습니다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못했습니다 당신이 가신 후 보는 책 족족 밑줄을 그었을 뿐입니다 이제 당신 차례입니다 내 온몸에 밑줄을 그어주세요 그 계단을 밟고 내려와 내 손을 잡아주세요
한 달 내내 보던 두꺼운 책을 찢어 버렸습니다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들지 못하다 결국 찢어진 책장을 한 장씩 한 장씩 스카치테이프로 붙였습니다 찢어진 밑줄이 너덜너덜한 밑줄이 되고 너덜너덜한 미로가 됩니다
미로 속에 갇힌 채 시계추처럼 똑 딱 똑 딱 흔들리는 내 몸이 나를 몇 번이나 돌려놔도 시계 바늘은 그 자리 그대로인데 한 줌의 재로 사라진 시간 위로 망가진 자음과 모음이 꽃비 되어 나리는 또, 봄입니다
'text 2'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성미, 추위에 대하여 (0) | 2019.10.09 |
---|---|
김소연, 한 개의 여름을 위하여 (0) | 2019.09.20 |
이제니, 창문 사람 (0) | 2019.09.11 |
문정영, 열흘나비 (0) | 2019.09.11 |
안희연, 선고 (0) | 2019.09.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