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먼지가 커다란 꽃처럼 피어올랐다. 빵 공장에서 트럭들이 쏟아져 나왔다.
트럭은 빵 공장에서 나갈 때는 보름달 빵처럼 부풀었다가
돌아올 때는 러스크 빵처럼 납작해 졌다.
흰 머릿수건을 하고 하늘색 제복을 입은 처녀들이 소리 없이 지나다녔다.
정자 나무 아래에 노인들이 죽은 듯이 잠을 자고 있었다. 매일이 똑같았다.
하나의 빵틀에서 똑같은 빵이 찍혀 나오듯이 오늘은 어제와 같고 내일도 오늘 같을 것이다.
그리고 네가 따라오고 있었다. 수없이 많은 네가.
시장 앞에서 노래를 하는 춘자 남편을 보았다.
흙투성이에 다 떨어진 교복 차림이지만 구두만은 늘 반짝반짝했다.
혹시 우리 춘자를 못 보았나요, 내 사랑 춘자를.
성은 김이고 이름은 춘자, 오 나의 사랑 춘자.
지옥의 주민들은 모두 삶은 달걀처럼 무표정하게 그 앞을 지나쳤다.
조금 있으면 지나가는 여자 하나하나를 붙잡고 물어보다가
전부 다 춘자라고 소리를 지르다가 모로 쓰러져 흙구덩이 속에 뒹굴겠지.
다리를 버르적거리면서 눈을 까뒤집고 입으로는 조용히 거품을 흘릴 것이다.
정신을 차리면 구두를 반짝반짝 윤이 나게 닦고 다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겠지.
나는 춘자 남편을 지나 잿빛 수채물이 흐르는 도랑을 뛰어넘었다.
어제와 똑같다.
너는 여전히 따라오고 있었다, 여전히.
아이들이 찬 공이 268번 버스 아래로 굴러 들어갔다.
차장이 오라잇 탕탕, 차 문을 두드렸다.
버스는 지옥에서 출발해서 어디 있는지 모를, 넓고 큰 딴 세상으로 갔다가 다시 지옥으로 돌아올 것이다.
축구공이 뻥, 소리를 내며 바퀴에 튕겨져 하늘 높이 날았다.
어디선가 무엇인가를 태우는 연기는 쉼없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너는 어느 때는 연기처럼 어느 때는 노는 아이처럼
어느 때는 바퀴며 공인 것처럼 보일 듯 말 듯 나를 따라왔다.
네 키는 나보다 한 뼘은 더 컸다.
네 얼굴은 크고 네모지고 검었다.
너에게선 늘 낯설고 수상한 냄새가 났다.
너를 두고 선생들은 산적 같다고 말했지만,
선생들이 어디서 산적을 만나 보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산적도 이런 지옥에는 살지 않을 것이고 선생들도 이 지옥에 살지 않았다.
선생들은 딴 세상에서 버스를 타고 와서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빈 도시락을 들고 딴 세상으로 가버렸다.
딴 세상에서 온 사람들이 가버리고나면 지옥에는
어둠과 먼지와 소란과 냄새, 연탄 가스, 뚱뚱한 누나들만 남았다.
또 있었다. 견딜 수 없는 것, 그것, 끔찍한 것, 사람머리, 머리통, 머릿수였다.
어떤 짐승보다도 사람이 많은 땅,
내 머리만한 면적에 내 머리칼 수보다 사람이 많은 세상, 지옥.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때,
지옥 중학교 3 학년 26 반은 다른 스물 다섯 개 반과 마찬가지로
시골에서 도시로 전학 온 아이들이 마흔 명쯤 됐다.
나는 그 중의 하나였다.
넓은 도시에서 하필이면 지옥구 지옥동으로 흘러 들어온 불쌍한 아이들이 스무 명쯤 됐다.
너는 그중 하나였다.
원래부터 살던 아이들은 열 명도 되지 않았다.
출신 성분이 복잡한 아이들은 서둘러 서열을 지었다.
1 등부터 10 등까지는 하루만에, 10 등 이하는 천천히,
그렇게 해서 몇 달 뒤 전교 5,000 여명의 서열이 만들어졌다.
거기서 왕이 된 아이가 말했다.
"나는 딴 학교에서 제일 힘 센 아이들하고 같이 놀고 있다.
나는 고등 학생하고도 논다. 나는 딴 세상의 진짜 깡패들도 알고 있다."
그런데 그 자랑스러운 아이가 바로 우리 반에 있는 너를 제일 무서워하다니,
네가 여차하면 면도칼을 휘두르는 갈 데 없는 독종이며
누구에게도 진 적이 없는 그 깡패에게 존경받는 이유가 무엇인지 나는 몰랐다.
나는 막 전학 온 시골 아이였으니까.
그 깡패에게 잘못 걸리면 죽는다는 건 곧 알게 되었다.
그걸 알아야 도시 변두리의 지옥 중학교에서 살아 남을 수 있었다.
성한 몸으로 졸 업해야 딴 세상, 딴 동네로 갈 수 있었다. 나는 그걸 몰랐다.
나는 막 전학을 왔으니까.
그 깡패는 그 위대한 진리를 가르쳐 주려고
아무렇게나 이유를 만들어 나를 변소 뒤로 데리고 갔다.
말라죽은 나무와 부서진 책상과 칠판이 쌓여 있고
구린내가 나는 후미진 곳에서 나는 깡패에게 맞았다.
맞느라고 점심시간이 끝나는 줄도 몰랐다.
나는 난생처음 남의 주먹에 코피가 터졌다.
그것 때문에 수업에 들어갈 수가 없어 난생처음 수업을 빼먹게 되었다.
가엾어라, 가엾게도 나는 울지 않았다.
그 대신에 내 인생의 목표를 바꾸었다.
깡패한테 맞아도, 맞아서 코피가 터져도, 수업에 들어가지 못해도 자살을 하지 않는 것.
그때 네가 다가왔다.
너는 느릿느릿 바지 단추를 채우면서 내 앞에 섰다.
"얼씨구, 여기 땡땡이 치는 놈이 또 있네."
너는 침을 찌익 뱉으면서 규율부처럼 말했다.
"너 누구하고 싸웠어?"
나는 싸운 적이 없다. 맞았을 뿐이다. 나는 일어섰다. 고개를 돌렸다.
네가 무엇이든, 내가 무엇이든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다.
가버리려고 했다.
그러나 고양이과 동물처럼 빠르고 가볍게 다가온 너는 내 어깨를 눌렀다.
바로 그때 나는 내 장래 희망을 바꾸었다.
살아서 이 지옥을 빠져나가기.
너는 빙글빙글 웃으면서 나를 흙먼지와 톱밥 속에 주저앉혔다.
나는 너를 노려보았을 뿐이다. 장래 희망을 바꾸었기 때문에.
봄이었다.
아프리카에서 코뿔소들이, 시베리아 벌판에서 사슴들이 각축하는 계절이 었다.
코딱지를 누렇게 만드는 흙먼지가 떠다니는 지옥의 공기에는
빵 공장에서 빵을 찌면서 내보내는 고소하고 시큼한 냄새가 섞였다.
하늘은 시퍼랬다. 매일 똑같았다.
너는 신기한 물건을 본 것처럼 네 손가락으로 내 턱을 쳐들었다.
네 손길은 너무나 부드러웠고 자연스러워서
누군가에게 어떤 식으로든 위안받고 싶어하던 내게 거부할 수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네가 말했다.
"넌 꼭 계집애같이 생겼구나."
나는 노려보고 노려보고 노려보다가 분해서 울고 말았다.
계집애처럼 흑흑 느껴 울었다.
너는 나를 한참이나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마음껏 울었다.
싸움과 코피와 수업을 빼먹었다는 것이 서럽지는 않았다.
너에게 계집애 취급을 받았다는 것이 슬펐다.
그런 취급을 받고도 아무 말도 못하고 찔찔 울기나 하는
내가 가여워서 머리가 아프도록 울었다.
너는 문득 사라졌다가 양동이에 물을 담아 가져왔다.
그 양동이에는 축구부라는 글자가 씌여 있었다.
그건 학교에서 가장 사나운 깡패들로 만들어진 축구부 말고는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물건이었다.
"씻어."
나는 너를 깨끗이 무시했다. 축구부 양동이와 축구부를 무시했다.
온 세상을 무시했다.
일어서서 나왔다.
네가 무섭지 않았다. 그저 창피했다.
다들 너를 피했다.
너를 피하는 아이들을 너는 무시했다.
그런데 너는 너를 싫어하는 나한테는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네가 무섭지 않았다. 그냥 싫었다.
웬일인지 너는 그전처럼 수업을 빼먹지 않았다.
선생들은 말했다.
"야, 오랜만에 백승호 얼굴을 보는구나. 잘 있었니."
그러면 너는 피식 웃으면서 의자를 뒤로 젖히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침으로 방울을 만들어 하나씩 날렸다.
옆에 있던 아이들이 웃음소리를 냈다.
그러면 선생은 얼굴이 발개져서 출석부를 접었다.
너는 아예 네 자리를 내 뒤로 옮겼다.
그리고 내 등을 칠판 삼아 연필로 한 자씩 썼다.
"너 죽어."
나는 네가 무섭지 않았다.
"그만둬! 싫어!"
칠판에 악보를 그리고 있던 음악 선생이 돌아보았고
앞자리에 앉았던 작은 아이들이 돌아보았고
옆자리에 있던 아이들과 뒷자리에 앉은 아이들이 숨을 죽였다.
너는 옆자리에 앉은 아이의 공책을 빼앗아 거기에 뭘 쓰는 척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무슨 일이냐고 묻는 선생에게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다.
선생은 내 머리를 출석부로 가볍게 탁탁치고는 교단으로 돌아갔다.
너는 그 뒤에 대고 주먹을 쥐어 앞뒤로 끄떡거리는 시늉을 했다.
아이들이 소리없이 웃었다.
나는 학교에서 너한테 소리를 지른 최초의 아이가 되었다.
나는 그게 자랑스럽지는 않았다. 매일이 똑같았다.
어쩌다 다른 날이 있기도 했다.
그 날도 길에는 빵 트럭이 지나다녔다.
길에서 공을 차던 아이들이 트럭 꽁무니에 달라붙어 같이 뛰기 시작했다.
빵 공장에서 나온 트럭들은 덜컹거리면서
달려가다가 이따금 빵을 떨어뜨리기도 했다.
그런데 그 날은 빵이 상자 째 내 코앞에 떨어졌다.
"빵이다, 빵!"
삽시간에 아이들 수십 명이 모여들었다.
작은 먼지 구름이 만들어지고 그 속에서 아이들은
서로를 깔아뭉개고 올라타고 물어뜯으며 빵을 나눠 가졌다.
나는 제일 가까이에서 제일 빨리 빵을 집었지만
봉지를 뜯기도 전에 누군가 손목을 쳐서 내 빵을 가져가 버렸다.
나는 빈 빵 상자를 앞에 두고 멍하니 서 있었다.
"빵 도로 놔, 새끼들아."
언제 네가 다가왔는지 아이들에게 나직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아이들은 순식간에 반쯤 뜯어먹은 빵까지 전부 다 상자에 내려놓았다.
나는 그냥 가려고 했다. 그런데 네가 나를 불렀다.
"너, 거기서 다섯 개 집어."
나는 무시했다. 나는 네가 싫었다.
네가 그런 식으로 나한테 접근해 오는게 싫었다.
"나는 빵 안 먹어."
보름달이 그려진 포장지 속에 든 빵이 얼마나 맛있는지 나는 진작에 알고 있었다.
하지만 끝내 그 빵을 집지 않았다. 나는 터덜터덜 집으로 갔다.
집 앞에서 너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너는 찢어진 네 모자 속에서 빵을 꺼내서 내게 내밀었다.
"왜 나한테 이러는 거니. 나는 거지가 아냐. 나는 빵이 싫어. 너도 싫어."
네 턱이 딱딱해졌다. 미술책에서 본 그리스 조각처럼 각이 졌다.
너는 고함을 치면서 빵을 팽개쳤다.
"사람 마음을 이렇게 모르냐."
너는 모자까지 찢어버렸다. 대문을 발로 힘껏 차고는 가버렸다.
"아니, 왜 대문을 차고 난리냐? 주인 보면 큰일날라."
누나가 달려나올 때까지 나는 찢어진 모자와
그 안에서 종이조각처럼 구겨진 빵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거 웬 빵이냐."
누나가 빵을 주워 모았다.
"버려. 버리란 말야."
"얘, 먹는 것 이렇게 버리는 법이 어디 있니. 포장도 안 뜯었는데. 오늘 저녁 대신 먹어도 되겠다."
누나는 그 날 돼지처럼 그 빵을 다 먹었다.
나는 누나가 싫었다.
누나가 싸주는 도시락도 싫었다.
그래서 잊어버린 척 다음날은 도시락을 가지지 않고 학교에 갔다.
학교가 끝나고 나니 배가 고팠다.
나는 빵 트럭을 따라 열심히 달렸다.
그렇지만 빵 상자는커녕 빵 한 봉지도 떨어지지 않았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그랬다.
하루하루가 똑같았다.
어쩌나 다른 날이 있기도 했다.
그 날 누나와 나는 아침을 굶어야 했다.
누나가 다니던 공장에서 월급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누나는 울었고 눈이 퉁퉁 부어서 공장으로 갔다.
나는 수돗물로 배를 채워서 누나처럼 배가 고프지는 않았다.
그 날 너는 교문 앞 빵집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너는 나를 끌고 빵집 안으로 들어갔다.
"이거 너 주려고 산 거야."
너는 김이 나는 찐빵을 내밀었다.
너는 커다란 암소가 그려진 우유도 주문했다.
나는 허기가 져서 쓰러질 것 같았지만 먹지는 않았다.
"먹어 봐."
"왜 나한테 이러는 거니."
"그냥 주고 싶어."
"난 네 부하가 아냐."
"너 같은 부하 필요 없다."
그때 온 가게 안에 튀김 냄새가 퍼졌다.
나는 기름기 많은 튀김을 싫어했다.
배고플 때 튀김을 먹으면 설사가 났다.
"저거 먹고 싶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마치 네 것인 양 얼른 튀김을 집어왔다.
가게 안에 있던 누구도 너에게 뭐라고 하지 않았다.
나는 그걸 새처럼 조금씩 나누어 먹었다.
내가 튀김을 먹는 동안
너는 착한 공룡처럼 눈을 두리번거리면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네가 싫었다. 나도 싫었다.
너는 튀김을 몇 봉지인가 싸서 가방 안에 넣어 주었다.
나는 누나 생각이 나서 그냥 가만히 있었다.
가게를 나오면서 나는 너에게 물었다.
"이 찐빵 가져가도 돼?"
너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찐빵도 가방이 터지도록 담아주었다.
그 날 저녁 나는 찐빵을, 누나는 튀김을 배가 터지도록 먹었다.
누나는 설사가 나서 그 다음날 공장을 가지 못했다.
또다시 똑같은 날이 반복됐다. 다른 날은 어쩌다 있었다.
독서실 안에는 내 자리가 있었다. 네 자리도 있었다.
내 자리는 고등 학생 반에 있었고 네 자리는 중학생 반에 있었다.
나는 공부를 하려고 독서실에 갔고 너는 나를 따라 독서실에 왔다.
너는 독서실에서 공부 같은 건 하지 않았다. 학교에서도 공부를 하지 않았다.
네가 왜 독서실에 나왔는지 나는 안다. 너는 나를 좇아왔다. 그렇다.
고개를 숙인 채 멀찌감치 전봇대 뒤에 숨어서 나의 눈을 피하던
너를 나는 숱하게 보았다. 나는 그런 너를 경멸했다.
그래도 아이들은 너를 존경했다.
너를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아이는 아무도 없었다.
네가 아이들에게 존경을 받는 이유를 나는 몰랐다.
오월, 아니 사월이던가.
학교 운동장에 있는 플라타너스 나무가 온몸 가득 새 잎을 피워 올리기 전까지는.
그 무렵 신체 검사라는 걸 했다.
신체 검사를 할 때 아이들은 교복 윗도리를 벗고
바지를 벗고 윗도리 속옷을 벗고
전날 쯤 목욕탕이나 부엌에서 때를 벗긴 몸을 드러냈다.
풍선처럼 뚱뚱한 아이들이 있었고
두부처럼 희고 네모진 아이들이 있었다.
길고 가는 몸이 있었고 납작하고 포동포동한 몸이 있었다.
아이들은 서로의 몸에 손톱자국을 내고 간지럼을 태우며 킬킬거렸다.
그런 아이들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네가 나타났던 것이다.
너에게는 우리에게 없는, 아니면 드물게 있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그것은 우리가 가끔 실오라기인줄 알고 잡아 뽑는,
막 돋아나기 시작하는 이상하고 낯선, 어른 냄새가 나는 털이었다.
그건 겨드랑이의 털이었고 가슴에서 배로, 배에서
속옷에 가려진 사타구니로 줄달음치는 털의 행렬이었다.
수백 개의 눈알이 너에게 집중되었고 흩어졌고 다시 들러붙었다.
반에서 제일 힘센 아이도 어쩔 수 없던 것은 바로 너의 털이었다.
네가 다른 아이들보다 나이가 많았던가. 그건 모르겠다.
네가 조숙했던가. 그것도 모르겠다.
네 생각이나 행동은 다른 아이들과 비슷했다.
다만 너는 너의 털로 존경을 받았다.
너는 털로 덮인 이상한 몸을 저울 위에 올려놓았다. 그 다음 차례가 나였다.
너는 내가 저울 위에 올라갔을 때 나를 흘끗 쳐다보았다.
"이거 어때 ?" 하고 묻는 듯이. 나는 잠자코 있었다. 내게는 상관이 없는 문제였다.
너는 내가 너나 너의 털을 존경하지 않는 것을 이상해 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내게 그걸 보여 주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그걸, 다른 아이들이 꿈도 꾸지 못하는 그것을.
나는 독서실로 가서 한 달 치 출입증을 끊고 여름 방학 동안 거기에서 공부를 했다.
내가 알기에 지옥을 잊는 방법, 지옥에서 빠져나가는 방법은 공부밖에 없었다.
나는 공부에 공부에 공부에 공부를 거듭했고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손을 대었다.
독서실 주인은 내게 고등 학생 반에 들어가도록 허락해 주었다.
대학 입학 시험을 준비하는 형들 사이에서 더욱 열심히 공부를 하라는 격려와 함께.
어느 날 네가 나타났다. 너는 반달 치 출입증을 끊었다.
나는 대학 입시를 준비하는 형들과 함께 있었고
너는 너를 무서워하는 아이들과 함께 있었다.
독서실의 중학생반에서는 분유 깡통에 전기를 연결한 젓가락을 집어넣어
라면 끓이는 기술과 수음 밖에는 공부 할 게 없었다.
나는 그 곳에 돌아갈 일이 없었다.
그러므로 어느 날 새벽 세 시에 내가 독서실 옥상으로 가지 않았다면
나는 여름 방학 내내 너를 만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독서실이 들어있는 건물과 맞붙어 있는 건물의 1 층은 목욕탕이었다.
한밤까지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살 냄새와 비누 냄새가 건물 뒤편을 돌아
중학생 반의 중학생과 고등학생 반의 고등학생 코에 닿기도 했다.
일요일 새벽에 바구니를 든 얼굴이 붉고 머리가 젖은 아가씨와 여인네들이
막 독서실 셔터를 올리고 집에 돌아가는 우리들과 마주치기도 했다.
그들은 뜨거운 물에 불린 몸과 마음을 뒤뚱거리며
입 안 가득 거품을 채운 듯이 쉴 새 없이 깔깔거렸다.
독서실 옥상에서 보이는 건 그 옥상과 똑같이 생긴 이웃 건물 옥상이었다.
그 옥상에는 작은 방이 있었다.
작은 방 너머에 전기 철탑이 거인처럼 서서 팔을 벌리고 있었다.
그 날 새벽달은 굴뚝 위를 넘어간 지 오래되었다.
지옥의 하늘에서는 원래부터 별을 볼 수 없었다.
작은 방에 세 든 처녀가 사는 방은 불이 꺼져 있었다.
처녀는 불을 켜고 자는 버릇이 있었다.
그 비밀을 아는 사람들은 재수생 형들이었다.
형들은 옥상으로 가는 계단에 번호 자물쇠를 걸었다.
번호를 아는 사람은 형들과 총무밖에 없었다.
나는 형들끼리 하는 이야기를 엿들었고 번호를 알게 되었다.
그래서 형들이 자는 것을 확인하고 번호 자물쇠를 열고 올라와 본 것이었다.
나는 독서실에서는 고등학생이었다.
지옥의 고등학생도 성장을 해야 했다.
성장을 하려면 불꺼지지 않는 처녀의 방을 엿보아야 했다.
처녀의 방을 엿보려면 옥상에 가야 했다.
그 처녀는 그들의 상상이 만든 성 속에 살고 있는 고귀한 공주였다.
공주는 공장에 다니고 있었고 자기 전에 옷을 모두 벗어제친 채
머리를 빗으며 노래를 부르는 습관이 있었다.
못된 계모에 의해 지옥의 탑에 유폐된 모든 공주가 그렇듯이.
나는 부질없이 손을 저어 불 꺼진 창 쪽으로 흔들었다.
흔들리는 나의 손을 저주했다. 사방에서 늘어진 끈들이 딱딱 소리를 냈다.
나는 네가 언제 옥상에 올라왔는지, 언제부터 나를 지켜보고 있었는지 몰랐다.
너는 전봇대처럼 우뚝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오랜만이다."
너는 담배를 튀겨 내 쪽으로 날려보냈다.
네가 긴장을 감추려고 그런다는 걸 나는 알았다.
"너 여기서 뭐 하니 ?"
나는 물었다.
마치 먼저 올라온 게 너이고 나중에 올라와서
너의 비행을 모두 목격한게 나이기라도 한 것처럼.
너는 나를 탓하지 않았다.
"너를 보러 왔다."
"왜 ?"
"기차를 타고 온갖 곳을 다 돌아다녔다. 네가 보고 싶어지더라."
그러면서 너는 옥상으로 올라오는 문에 쇠를 걸었다.
나는 지붕의 감옥에 갇힌 셈이었다.
그래서 네가 말을 걸어오는 것을 잠깐 받아주었다.
하긴 그때 나는 한 번도 기차를 타본 적이 없는 중학생이기도 했다.
"어디로 ?"
"은척까지 갔다. 여기에서 은척까지 있는 역마다 다 내렸다.
은척에서 여기까지 오면서 모든 역에 다 가보았다."
"바보야, 그 역이 그 역이지 뭐냐."
웃을 일이 없는데도 웃음이 나왔다. 너도 어색하게 웃었다.
"저 너머 방에 누가 사니 ?"
"몰라."
나는 그전처럼 냉정한 중학생으로 돌아갔다. 서둘렀다. 누가 올지도 몰랐다.
재수생 형들이 알면 나를 반쯤 죽여 중학생 반으로 도로 돌려보낼지도 몰랐다.
내가 너를 지나치려고 하자 바보인 네가 감히 내 팔을 잡았다.
"그냥 갈 거야 ?"
네 손길에는 소름이 끼치도록 부드럽고 질기고 단호한 힘이 들어있었다.
그건 사랑에 빠진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것.
"그래."
나는 너와 사랑에 빠질 정도로 어리석은 중학생이 아니었다.
나는 쌀쌀하게 너를 뿌리쳤다. 너는 뜨겁게 호소했다.
"우리 이야기 좀 하자."
"할 말 없어."
우리는 잠시 실랑이를 벌였다. 그런 와중에 네가 헐떡거리며 소근거렸다.
"그렇게 여자를 보고 싶니 ?"
"뭘 ?"
"네가 왜 옥상에 왔는지 안다."
나는 창피했다. 너에게 화가 났다.
"내가 보여 줄게."
"싫다."
"이따가 목욕탕 문 열면 건물 뒤로 와. 건물하고 담 사이로 좁은 길이 있다. 거기로."
"안 갈 거다."
나는 그 자리를 알고 있었다.
건물 뒤 사람 손이 닿지 않을 정도로 높은 담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했고 그 위에 날카로운 유리 조각이 꽂혀 있었다.
담과 유리는 담을 넘어 들어가거나 담 위에 올라 창문을 통해
목욕탕 안을 들여다보려는 저주받을 호기심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었다.
"다섯 시다."
너는 그 말만 하고 가버렸다. 나는 손을 씻었다. 씻고 또 씻었다.
가지 않겠다고 맹 세했다.
책상에 엎드려 잠을 잤다. 자려고 했다.
그런데도 웬일인지 나는 새벽 다섯시,
목욕탕 창문으로 김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할 무렵,
건물 뒤편 쓰러질 듯이 위태롭게 서 있는 담 아래에 서 있게 되었다.
"왔구나."
너는 미리 와 있었다. 너는 담 밑에 있는 판자를 치웠다.
판자 아래에는 네가 쌓아 놓은 벽돌이 있었다.
그 벽돌을 딛고 담 위로 올라갈 수 있도록.
"올라가. 내가 받쳐 줄게."
너는 나보다 키가 한 뼘은 더 컸다.
너는 나보다 두 배는 더 힘이 셌다.
네가 받쳐 주면 될 것이다.
네가 올려 주면 될 것이다.
네가 믿음직하고 성실해 보일수록 부끄럽고 창피한 느낌이 커졌다.
그래서 나는 다른 핑계를 찾았다.
"담 위에 유리가 있잖아."
목욕탕 뒤편 창문은 담보다 더 높았다.
담에 올라서야 안이 보이는데 그 담 위에는 유리가 박혀 있는 것이다.
나는 기껏 호기심이나 채우자고 엉덩이가 찢어질 위험을 감수할 생각은 없었다.
"내가 치워놨어."
그랬다.
너는 몇 시간 전부터 미리 그 곳에 와서 담 위로 올라간 다음
한 사람이 앉을만한 자리만큼 유리를 부수어 놓았다.
네가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들키지 않으려고 얼마나 조심했는지,
왜 그런 일까지 했는지 내가 생각하는 동안 너는 문득 내 발을 받쳐 올렸다.
나는 얼떨결에 담 위에 올라갔다. 올라탔다. 네가 밑에서 말했다.
"보이지 ?"
보이지 않았다. 목욕탕 안은 김으로 꽉 차 있었다.
김 속에서 어른거리는 것이 사람인지 고깃덩어리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게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구별할 수 없었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안다고 해도
옷을 벗고 있는지 입고 있는지 벗는 중인지 입는 중인지도 알 수 없었다.
내가 고개를 흔들자 밑에서 안타까워하던 네가 마침내 담으로 올라왔다.
너는 대포처럼 김을 쏟아 내는 목욕탕 창문을 보고는 내게 사과했다.
"다음에 오면 괜찮을 거야. 오늘은 재수가 없구나."
뾰족한 유리 위에 커다란 엉덩이를
힘겹게 걸친 네게 나는 괜찮다고 대답해 주려고 했다.
네가 미안해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해 주려고 했다.
다시는 이따위 담 위에서 너 하고 참새처럼 나란히 앉지 않겠다고 말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럴 틈도 없이,
"네, 네, 네이 요놈들 !"
소리치며 목욕탕 안쪽에서 누군가 뛰어나왔다.
새벽의 희붐한 빛 속에서 손에 망치를 든 누군가.
나는 허둥대다가 구두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내 구두 !"
누나가 사준 구두. 다 떨어졌지만 단 하나뿐인 내 구두.
너는 나를 담 바깥으로 떠다밀었다.
나는 담 밖으로 떨어져서도 구두, 구두를 외쳤다.
네가 담 안쪽으로 떨어지는 걸 보고 절름거리며 도망쳤다.
너는 엉덩이를 유리에 찢겼다. 망치에 정강이뼈를 맞았다.
그렇지만 내 구두처럼 담 안으로 떨어진 건 아니다.
네가 뛰어내렸다.
너는 주인에게 허리를 잡혔고 뺨을 맞았고 주인의 의기양양한 욕설을
들어가며 구두를 찾았고 찾고 나서는 주인을 떠밀어 나동그라지게 했고
구두를 들고 우리 집 대문 앞으로 나를 찾아왔다. 네가 말했다.
"미안하다."
생각해 보면 나는 지금까지 너에게 한 번도 미안하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
미안하다는 말은 모두 네 차지였다.
나는 구두 한 짝을 건네 받았고 고맙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단 한마디 말만 했다.
"너는 ?"
너는 말없이 무릎까지 바지를 걷어 내게 보여 주었다.
발목에서 무릎까지 시퍼렇게 멍이 든, 털이 무성한 네 다리를.
나는 돌아섰다. 그리고,
"미안하다."
그 말이 네 입에서 나왔다.
"다음에 더 멋있는 걸 보여 줄게."
그 말도 너의 입에서 나왔다.
어제의 어제는 어제의 오늘과 같았다.
빵 공장에서는 오전 열 시만 되면 김이 솟아 올랐다.
김에는 빵이 익을 때 나는 고소하고 시큼한 냄새가 섞여 있었다.
그 냄새는 공장 근처 하늘을 연처럼 돌아다니다가 점심 시간 직전에
교실로 흘러 들어 아이들의 뱃속을 간지럽혔다.
아이들은 빵과 원수가 져서 빵만 보면 미친 듯이 달려들어 먹어 치우려고 했다.
"너, 빵집 계집애 알지."
교문 앞 빵집의 여자아이는 네 말처럼 계집애가 아니라
중학교를 졸업하고 집안일을 돕고 있는 처녀였다.
그 처녀를 모르는 아이들은 없었다.
학교를 갔으면 아마 고등학교 2학년?
그 처녀는 늘씬하고 아름답고 가슴이 불룩 솟았고 잔소리가 심했고
중학생들이 자신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했다.
그 처녀 앞에서는 가장 싸움을 잘하는 아이를 포함해서
그 누구도 꼼짝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원수 같은 찐빵만 배가 터지도록 먹는 수밖에 없었다.
언제든지 아이들을 얼려버릴 수 있는 그 차디찬 눈길,
경멸과 권태로 가득한 표정, 쌀쌀하고 매운 손길.
그런데도 그 가게 앞을 그냥 지나쳐 갈 수 있는 아이들은 거의 없었다.
학교 변소에 있는 낙서들,
거기에서 가르치는 그녀의 아름다움, 호색성,
냉혹함의 신화는 아무것도 모르는 1 학년 아이들조차
거부할 수 없는 은밀한 빵 배급과 같았다.
"난 계집애들한테 관심 없어."
나는 그렇게 말했다.
내 대답에 거짓이 섞이기는 했지만 거짓만큼 진실도 섞여 있었다.
그때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던 사람은 변소에서
그 처녀와 비슷한 빈도수로 발견되는 이야기의 주인공인 음악 선생이었다.
"그거 내가 먹었다."
거짓말. 그 처녀에게서는 늘 드라이 아이스처럼 찬 김이 뿜어져 나왔다.
아이들이 빵가게 앞에서 일없이 조금 머뭇거리든가,
살짝 들여다본다든가 하면 당장 용암과 같은 욕설이 터져 나왔다.
그 욕설의 첫 대목이나 마지막 대목을 장식하는 말은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새끼들' 이라는 말이었다. 매일 똑같았다.
그런데 그 마녀 같은 처녀를 처먹어 ?
가을이 되자 딴 세상처럼 너와 내가 사는 세상에도 바람이 자주 불었다.
집 근처 예전 과수원 자리에 몇 그루 안남은
배나무에는 작고 뻔뻔스럽게 생긴 배가 열렸다.
곧 그 나무도 배도 쓰레기에 묻힐 운명이었다.
너는 나를 따라왔다. 항상 내 주변에 어른거렸다.
"걔를 좋아해 ?"
나는 그 처녀를 잘 몰랐다. 질투 같은 건 하지도 않았다.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런데도 너는 뽐내며 말했다.
"나는 관심이 없는데 그 계집애가 자꾸 따라다니거든.
그런데 걔는 꼭 구멍난 속옷을 입는다 ?
너 좋아하면 하나 갖다 줘 ?"
네가 그럴 때마다 나는 너를 경멸했다. 벌레 먹은 배가 떨어졌다.
내가 가려고 하자 너는 초조해 했다.
"너한테 걔 먹는 걸 보여 줄까."
나는 네 눈을 들여다보았다.
"네 맘대로 해."
너는 풀이 죽었다. 그래도 끈질기게 속삭였다.
"내일 시험 끝나면 곰바위로 와줄래 ?"
나는 집에 와서 손을 씻었다. 네 말 같은 건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런데도 내가 시험을 마치고 곰바위로 간 건 무엇 때문이었을까.
곰바위는 이따금 어른 남녀가 이상한 짓을 벌인다는 소문이 나있는
학교 뒷산의 으슥한 곳이었다. 나는 그 전날 밤에 한잠도 자지 못했다.
시험 준비하느라 밤을 새우려고 했다.
그렇게 해서 다시 1 등을 차지하려고 했다.
지옥을 빠져나가는 1 등석 기차표를 얻으려고 했다.
너는 공부를 못하면서, 공부를 잘 할 생각도 없으면서
내가 왜 공부를 하는지도 모르면서 공부 잘하는 나를 따라다녔다.
어른에 가까우면서 아이와 가까운 나를 좋아했다.
어쩌면 내가 너의 잘난 것 어느 한 가지라도 존중해 줄 수 있다면
너의 맹목적인 헌신에 대한 빚 갚음이 될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지옥에서도 나는 성장해야 했다.
내가 가방을 든 채 바위 위로 올라갔을 때 너는 없었다. 처녀도 없었다.
나는 바위 위에 누워서 내가 왜 거기까지 왔는지를 생각해 봤다.
누나가 처음으로 탄 월급으로 사준 단벌 구두까지 신고,
그 구두의 콧등까지 까져 가면서. 내가 네 말을 믿다니.
나는 지옥의 가을 햇빛 아래에서 혼자 웃었다. 속아 준 것으로 빚은 없다.
와준 것으로 깨끗해졌다. 나는 돌아가려고 했다. 그때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나는 바위 위에 납작 엎드렸다. 그냥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그 목소리가 너의 것인지 다른 사람의 것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굵어서 알아들을 수 없는 남자의 목소리에 이어
"추워" 하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을 때
내 가슴속에 다른 가슴이 들어 있어서 격렬히 다투는 것처럼 쿵쾅거렸다.
그리고 곧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수 있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내가 난생 처음 들었음에도.
그건 남자와 여자의 피부 가운데 가장 연약한 부분이 맞닿아 나오는 소리였다.
쯔읍, 하고 길게 끄는 소리.
짭짭, 하고 연속적으로 나는 소리.
쭈욱, 하고 무엇인가 잡아당겨지는 소리.
나는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 다음부터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빵 냄새 비슷한 시큼한, 시궁창처럼 더러운,
목욕탕 김처럼 수상한 냄새가 한꺼번에 덤벼드는 것 같았다.
바위 위에서 내려다보이는 교정은 너무도 조용했다.
플라타너스들은 장난감 병정처럼 씩씩했고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들려 왔다.
나는 바위 밑 에 있는 사람들이 가버렸기를 바랐다.
그들이 갔으면 나도 가리라 했다.
아무도 없는 교정 한모퉁이에서 음악 선생의 노래를 들으리라.
그전처럼 알 수 없는 감정이 북받쳐 목이 메일지도 몰랐다. 나는 고개를 내밀었다.
아무도 없으면 바위에서 내려가려고.
그런데 바위 밑에서 무엇인가 움직이고 있었다.
그건 누군가의 엉덩이였다.
그 엉덩이가 네 것인가.
나는 너에게 물어 본 적이 없다.
네가 나에게 그때 곰바위에 와보았느냐고 묻지 않았듯이.
다만 그 엉덩이 아래에 길고 매끈한 두 다리가 더 뻗쳐 있던 것을 기억한다.
나는 눈부시다 못해 아픈 햇빛을 반사하는 아래에 깔린 흰 다리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뒤에서 누군가 발을 잡아당기는 것 같아 나는 딸려 가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앞에서 누군가 끌어당기는 것 같아 끌려가지 않으려고 기를 썼다.
행여 떨어질까 싶어 모자를 움켜쥐었다. 그 동안 다리의 모양이 바뀌었다.
다리의 임자 얼굴이 드러났다. 그건 눈을 감고 있는 빵집의 처녀였다.
머리칼이 흐트러진 처녀였다. 그 처녀의 다리가 흔들리고 앙다문 입술이 흔들렸다.
내 입에서는 단내가 났다. 눈앞에 엄청난 밝기의 전구가 켜진 듯했다.
확실치는 않다. 확실치 않아. 그 처녀가 언제 눈을 떴던가.
나와 눈을 마주치기까지 얼마나 오랫동안 눈을 감고 있었던가.
오오오, 나는 돌이 굴러내려 내가 보고 있었다는 것을 들키고,
소리가 나서 놀란 두 사람이 떨어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떨어지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뛰어내려, 긁히고 찢기는 것도 모르고
수백 미터 산길을 뛰어내려갔다.
그녀의 눈은 집에까지 따라오고 꿈속까지 따라오고
내가 처음 여자와 자던 20 대의 어느 날까지 나를 따라왔다.
어쩌면 지금까지도 가끔 따라온다. 따라 온다, 그 눈이.
나는 사랑에 빠졌던 것이다. 바로 그 처녀의 눈에 빠졌다.
놀람과 분노와 당혹감을 한껏 떠진 눈으로 총알처럼 쏘아 보내던 눈빛.
희고 검은 부분의 경계선이 지금도 손으로 그릴 수 있을 만큼 뚜렷한 그 눈.
동그란 눈. 흡뜬 눈.
그 날 이후 매일 똑같았다.
나는 너를 상대하지 않았고 그 처녀는 중학생을 상대해 주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 떨어져서 도는 행성과 같았다.
너는 슬픔에 잠겨 네 맘대로 했고 나는 시름에 겨워 내 마음대로 했다.
너는 퇴학을 당했고 나는 지옥에서의 마지막 시험을 치렀다.
네가 사라지고 나서 그 처녀도 사라졌다.
졸업식을 하기 전에 숫자가 적힌 종이 조각을 나누어 받았다.
그 번호를 가지고 추첨을 해서 진학하게 될 고등학교를 정한다고 했다.
공고나 상고, 또 지옥의 특수지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된 아이들은
그런 종이 조각 따위는 받지 않았다.
불합격자에게는 당연히 그런 종이 조각이 돌아가지 않았다.
그러니 학교를 중퇴하고 검정고시도 보지 않았으며
공고나 상고에는 관심도 없는 네가 그 종이 조각을 나누어주는 특정한 날,
특정한 장소에 나타난 것은 이상한 일이기는 했다.
나는 종이 조각을 받자마자 교실 밖으로 뛰쳐나갔고
해방의 포만감으로 누나처럼 뚱뚱해지고 두 뼘은 키가 커져서 운동장을 달렸다.
빵집 간판이 넘겨다 보였을 때 잠시 멈추었지만,
사랑은 다 그런 법이라는 노래 가사를 떠올렸을 뿐.
그때 햇빛을 받으며 걸어오는 너를 보았다.
너는 두껍고 커다란 외투를 입고 보기에도
멋진 모자를 쓰고 있어서 딴 세상에서 온 부자처럼,
기관사나 뱃사람이나 비행사, 우주인처럼 보였다.
"어디 가니?"
"너는?"
우리는 운동장에서 마주섰다. 네가 천천히 다가왔다.
너를 보는게 마지막이라는 느낌이 든 건 왜였을까.
네 얼굴을 비추는 노란 햇빛은 내가 가게 될 다른 좋은 세상에서 오는 것 같았다.
해를 등지고 있는 내 몸에서 뻗은 그림자는 짧고 짙었다.
"한 번 안아 보자."
"그래."
나는 처음으로 너를 받아들였다.
네가 나를 안았던 팔을 풀고 외투 단추를 풀면서 말했다.
"너, 다시는 안 오겠구나."
"그래."
너는 외투를 벌렸다. 나는 마지막으로 네 품안에 스며들었다.
"사랑한다."
너는 나를 깊이 안았다.
"나도."
지나가던 아이들이 우리를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지옥의 공장에서 빵 트럭이 쏟아져 나오고
딴 세상 바다에선 고래들이 펄쩍 뛰어오르던 그때,
나는 비로소 내가 사내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