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 2

김하늘, 살구눈물

2019. 5. 24. 19:33
나는 막 방금 울었는데
태어나서 처음 울어 본 기분이 들어
캐비닛 속에 오랫동안 잊혀져 있다가
오늘 꺼내 본 불어사전처럼
그렇게 낡고 낡은 눈물이 났어
괜찮아,
라고 말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모든 게 괜찮아질 것 같았어

부서진 크래커처럼,
망가진 모래성처럼,
흩어질 대로 흩어져서 가루가 된 마음으로
아직 버리지 못한 일기장 같은 건 없어
다만 조용해지는 것, 그 가느다란 고요 속에
내 심장을 두고 왔어
그래서 눈물이 나나 봐
아무런 통증도 없는

숨을 쉰다
어디선가 예쁜 손이 나타났고
그 손이 내 뺨을 감싸 쥔다
따듯한 등에 업혀 있는 느낌이 나
먹기 좋게 식은 스프를 목구멍으로 넘기고 있어
어디선가 다정한 냄새가 나고……

이제야 평온해졌어
다 망가졌는데,
삶은
살구빛이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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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쪽으로 간다 당신은
숨숨숨 숨을 놓겠다는 건가요 해가 저렇게 퍼런데
벌레들도 용맹하게 잎을 갉으며 살아가는데

그러고 보니 당신의 등이 굽었다 오래오래 지쳤다는 증거
낙타를 동경하던 당신이 스스로 낙타가 되었다

서쪽에 이르렀을 때 당신 앞에
큰 의자가 놓여 있으면 좋겠다 침대면 더 좋다
거기서 오랫동안 당신이 잠에 빠졌으면 좋겠다

함께 갈까요? 하는 듯이 당신이 내 눈을 오랫동안 들여다보았을 때
함께 갈 수 없는 길이잖아요 라는 듯이 나는 눈을 피했다

하필 초록의 전쟁이 벌어진 이 봄날에
당신은 서쪽으로 간다 그런 당신에게
안 갈 수 없나요? 라는 물음은 부질없다
서쪽으로 가서, 당신은 새로운 모습으로
말을 타고 이곳으로 돌아올 수도 있을까
내가 지켜본 평소의 당신이라면 어려울 듯싶은데

희미한 미소를 마지막으로 남기며
당신은 기어이 내게 등을 돌렸다
암실이 돼 있는 서쪽으로 천천히 뚜벅뚜벅,

이후로 당신을 만나려면 사진으로만 만나야 한다
그런데 불행히도 당신과 함께 찍은 사진이 하나도 없다

이런 그동안 뭐했나,
뭐였나, 서로에게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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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석제, 첫사랑

2019. 2. 21. 14:09

흙먼지가 커다란 꽃처럼 피어올랐다. 빵 공장에서 트럭들이 쏟아져 나왔다. 

트럭은 빵 공장에서 나갈 때는 보름달 빵처럼 부풀었다가 

돌아올 때는 러스크 빵처럼 납작해 졌다.

흰 머릿수건을 하고 하늘색 제복을 입은 처녀들이 소리 없이 지나다녔다. 

정자 나무 아래에 노인들이 죽은 듯이 잠을 자고 있었다. 매일이 똑같았다. 

하나의 빵틀에서 똑같은 빵이 찍혀 나오듯이 오늘은 어제와 같고 내일도 오늘 같을 것이다. 

그리고 네가 따라오고 있었다. 수없이 많은 네가.

시장 앞에서 노래를 하는 춘자 남편을 보았다.

흙투성이에 다 떨어진 교복 차림이지만 구두만은 늘 반짝반짝했다. 

혹시 우리 춘자를 못 보았나요, 내 사랑 춘자를.

성은 김이고 이름은 춘자, 오 나의 사랑 춘자.

지옥의 주민들은 모두 삶은 달걀처럼 무표정하게 그 앞을 지나쳤다.

조금 있으면 지나가는 여자 하나하나를 붙잡고 물어보다가 

전부 다 춘자라고 소리를 지르다가 모로 쓰러져 흙구덩이 속에 뒹굴겠지. 

다리를 버르적거리면서 눈을 까뒤집고 입으로는 조용히 거품을 흘릴 것이다. 

정신을 차리면 구두를 반짝반짝 윤이 나게 닦고 다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겠지. 

나는 춘자 남편을 지나 잿빛 수채물이 흐르는 도랑을 뛰어넘었다. 

어제와 똑같다. 

너는 여전히 따라오고 있었다, 여전히. 

아이들이 찬 공이 268번 버스 아래로 굴러 들어갔다. 

차장이 오라잇 탕탕, 차 문을 두드렸다. 

버스는 지옥에서 출발해서 어디 있는지 모를, 넓고 큰 딴 세상으로 갔다가 다시 지옥으로 돌아올 것이다. 

축구공이 뻥, 소리를 내며 바퀴에 튕겨져 하늘 높이 날았다. 

어디선가 무엇인가를 태우는 연기는 쉼없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너는 어느 때는 연기처럼 어느 때는 노는 아이처럼 

어느 때는 바퀴며 공인 것처럼 보일 듯 말 듯 나를 따라왔다. 

네 키는 나보다 한 뼘은 더 컸다. 

네 얼굴은 크고 네모지고 검었다. 

너에게선 늘 낯설고 수상한 냄새가 났다. 

너를 두고 선생들은 산적 같다고 말했지만, 

선생들이 어디서 산적을 만나 보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산적도 이런 지옥에는 살지 않을 것이고 선생들도 이 지옥에 살지 않았다. 

선생들은 딴 세상에서 버스를 타고 와서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빈 도시락을 들고 딴 세상으로 가버렸다. 

딴 세상에서 온 사람들이 가버리고나면 지옥에는 

어둠과 먼지와 소란과 냄새, 연탄 가스, 뚱뚱한 누나들만 남았다. 

또 있었다. 견딜 수 없는 것, 그것, 끔찍한 것, 사람머리, 머리통, 머릿수였다. 

어떤 짐승보다도 사람이 많은 땅, 

내 머리만한 면적에 내 머리칼 수보다 사람이 많은 세상, 지옥.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때, 

지옥 중학교 3 학년 26 반은 다른 스물 다섯 개 반과 마찬가지로 

시골에서 도시로 전학 온 아이들이 마흔 명쯤 됐다. 

나는 그 중의 하나였다. 

넓은 도시에서 하필이면 지옥구 지옥동으로 흘러 들어온 불쌍한 아이들이 스무 명쯤 됐다. 

너는 그중 하나였다. 

원래부터 살던 아이들은 열 명도 되지 않았다. 

출신 성분이 복잡한 아이들은 서둘러 서열을 지었다. 

1 등부터 10 등까지는 하루만에, 10 등 이하는 천천히, 

그렇게 해서 몇 달 뒤 전교 5,000 여명의 서열이 만들어졌다. 

거기서 왕이 된 아이가 말했다. 


"나는 딴 학교에서 제일 힘 센 아이들하고 같이 놀고 있다. 

나는 고등 학생하고도 논다. 나는 딴 세상의 진짜 깡패들도 알고 있다." 


그런데 그 자랑스러운 아이가 바로 우리 반에 있는 너를 제일 무서워하다니, 

네가 여차하면 면도칼을 휘두르는 갈 데 없는 독종이며 

누구에게도 진 적이 없는 그 깡패에게 존경받는 이유가 무엇인지 나는 몰랐다. 

나는 막 전학 온 시골 아이였으니까. 

그 깡패에게 잘못 걸리면 죽는다는 건 곧 알게 되었다. 

그걸 알아야 도시 변두리의 지옥 중학교에서 살아 남을 수 있었다. 

성한 몸으로 졸 업해야 딴 세상, 딴 동네로 갈 수 있었다. 나는 그걸 몰랐다. 

나는 막 전학을 왔으니까. 

그 깡패는 그 위대한 진리를 가르쳐 주려고 

아무렇게나 이유를 만들어 나를 변소 뒤로 데리고 갔다. 

말라죽은 나무와 부서진 책상과 칠판이 쌓여 있고 

구린내가 나는 후미진 곳에서 나는 깡패에게 맞았다. 

맞느라고 점심시간이 끝나는 줄도 몰랐다. 

나는 난생처음 남의 주먹에 코피가 터졌다. 

그것 때문에 수업에 들어갈 수가 없어 난생처음 수업을 빼먹게 되었다. 

가엾어라, 가엾게도 나는 울지 않았다. 

그 대신에 내 인생의 목표를 바꾸었다. 

깡패한테 맞아도, 맞아서 코피가 터져도, 수업에 들어가지 못해도 자살을 하지 않는 것. 

그때 네가 다가왔다. 

너는 느릿느릿 바지 단추를 채우면서 내 앞에 섰다. 


"얼씨구, 여기 땡땡이 치는 놈이 또 있네." 


너는 침을 찌익 뱉으면서 규율부처럼 말했다. 


"너 누구하고 싸웠어?" 


나는 싸운 적이 없다. 맞았을 뿐이다. 나는 일어섰다. 고개를 돌렸다. 

네가 무엇이든, 내가 무엇이든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다. 

가버리려고 했다. 

그러나 고양이과 동물처럼 빠르고 가볍게 다가온 너는 내 어깨를 눌렀다. 

바로 그때 나는 내 장래 희망을 바꾸었다. 

살아서 이 지옥을 빠져나가기. 

너는 빙글빙글 웃으면서 나를 흙먼지와 톱밥 속에 주저앉혔다. 

나는 너를 노려보았을 뿐이다. 장래 희망을 바꾸었기 때문에. 

봄이었다. 

아프리카에서 코뿔소들이, 시베리아 벌판에서 사슴들이 각축하는 계절이 었다. 

코딱지를 누렇게 만드는 흙먼지가 떠다니는 지옥의 공기에는 

빵 공장에서 빵을 찌면서 내보내는 고소하고 시큼한 냄새가 섞였다. 

하늘은 시퍼랬다. 매일 똑같았다. 

너는 신기한 물건을 본 것처럼 네 손가락으로 내 턱을 쳐들었다. 

네 손길은 너무나 부드러웠고 자연스러워서 

누군가에게 어떤 식으로든 위안받고 싶어하던 내게 거부할 수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네가 말했다. 


"넌 꼭 계집애같이 생겼구나." 


나는 노려보고 노려보고 노려보다가 분해서 울고 말았다. 

계집애처럼 흑흑 느껴 울었다. 

너는 나를 한참이나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마음껏 울었다. 

싸움과 코피와 수업을 빼먹었다는 것이 서럽지는 않았다. 

너에게 계집애 취급을 받았다는 것이 슬펐다. 

그런 취급을 받고도 아무 말도 못하고 찔찔 울기나 하는

내가 가여워서 머리가 아프도록 울었다. 

너는 문득 사라졌다가 양동이에 물을 담아 가져왔다. 

그 양동이에는 축구부라는 글자가 씌여 있었다. 

그건 학교에서 가장 사나운 깡패들로 만들어진 축구부 말고는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물건이었다.


"씻어." 


나는 너를 깨끗이 무시했다. 축구부 양동이와 축구부를 무시했다. 

온 세상을 무시했다. 

일어서서 나왔다. 

네가 무섭지 않았다. 그저 창피했다. 

다들 너를 피했다. 

너를 피하는 아이들을 너는 무시했다. 

그런데 너는 너를 싫어하는 나한테는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네가 무섭지 않았다. 그냥 싫었다. 

웬일인지 너는 그전처럼 수업을 빼먹지 않았다. 

선생들은 말했다. 


"야, 오랜만에 백승호 얼굴을 보는구나. 잘 있었니." 


그러면 너는 피식 웃으면서 의자를 뒤로 젖히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침으로 방울을 만들어 하나씩 날렸다. 

옆에 있던 아이들이 웃음소리를 냈다. 

그러면 선생은 얼굴이 발개져서 출석부를 접었다. 

너는 아예 네 자리를 내 뒤로 옮겼다. 

그리고 내 등을 칠판 삼아 연필로 한 자씩 썼다. 


"너 죽어." 


나는 네가 무섭지 않았다. 


"그만둬! 싫어!" 


칠판에 악보를 그리고 있던 음악 선생이 돌아보았고 

앞자리에 앉았던 작은 아이들이 돌아보았고 

옆자리에 있던 아이들과 뒷자리에 앉은 아이들이 숨을 죽였다. 

너는 옆자리에 앉은 아이의 공책을 빼앗아 거기에 뭘 쓰는 척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무슨 일이냐고 묻는 선생에게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다. 

선생은 내 머리를 출석부로 가볍게 탁탁치고는 교단으로 돌아갔다. 

너는 그 뒤에 대고 주먹을 쥐어 앞뒤로 끄떡거리는 시늉을 했다. 

아이들이 소리없이 웃었다. 

나는 학교에서 너한테 소리를 지른 최초의 아이가 되었다. 

나는 그게 자랑스럽지는 않았다. 매일이 똑같았다.

어쩌다 다른 날이 있기도 했다. 



그 날도 길에는 빵 트럭이 지나다녔다. 

길에서 공을 차던 아이들이 트럭 꽁무니에 달라붙어 같이 뛰기 시작했다. 

빵 공장에서 나온 트럭들은 덜컹거리면서 

달려가다가 이따금 빵을 떨어뜨리기도 했다. 

그런데 그 날은 빵이 상자 째 내 코앞에 떨어졌다. 


"빵이다, 빵!" 


삽시간에 아이들 수십 명이 모여들었다. 

작은 먼지 구름이 만들어지고 그 속에서 아이들은 

서로를 깔아뭉개고 올라타고 물어뜯으며 빵을 나눠 가졌다. 

나는 제일 가까이에서 제일 빨리 빵을 집었지만 

봉지를 뜯기도 전에 누군가 손목을 쳐서 내 빵을 가져가 버렸다.

나는 빈 빵 상자를 앞에 두고 멍하니 서 있었다. 


"빵 도로 놔, 새끼들아." 


언제 네가 다가왔는지 아이들에게 나직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아이들은 순식간에 반쯤 뜯어먹은 빵까지 전부 다 상자에 내려놓았다. 

나는 그냥 가려고 했다. 그런데 네가 나를 불렀다.


"너, 거기서 다섯 개 집어." 


나는 무시했다. 나는 네가 싫었다. 

네가 그런 식으로 나한테 접근해 오는게 싫었다.


"나는 빵 안 먹어." 


보름달이 그려진 포장지 속에 든 빵이 얼마나 맛있는지 나는 진작에 알고 있었다.

하지만 끝내 그 빵을 집지 않았다. 나는 터덜터덜 집으로 갔다. 

집 앞에서 너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너는 찢어진 네 모자 속에서 빵을 꺼내서 내게 내밀었다. 


"왜 나한테 이러는 거니. 나는 거지가 아냐. 나는 빵이 싫어. 너도 싫어." 


네 턱이 딱딱해졌다. 미술책에서 본 그리스 조각처럼 각이 졌다. 

너는 고함을 치면서 빵을 팽개쳤다. 


"사람 마음을 이렇게 모르냐." 


너는 모자까지 찢어버렸다. 대문을 발로 힘껏 차고는 가버렸다. 


"아니, 왜 대문을 차고 난리냐? 주인 보면 큰일날라." 


누나가 달려나올 때까지 나는 찢어진 모자와 

그 안에서 종이조각처럼 구겨진 빵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거 웬 빵이냐." 


누나가 빵을 주워 모았다. 


"버려. 버리란 말야." 


"얘, 먹는 것 이렇게 버리는 법이 어디 있니. 포장도 안 뜯었는데. 오늘 저녁 대신 먹어도 되겠다." 


누나는 그 날 돼지처럼 그 빵을 다 먹었다. 

나는 누나가 싫었다. 

누나가 싸주는 도시락도 싫었다. 

그래서 잊어버린 척 다음날은 도시락을 가지지 않고 학교에 갔다.

학교가 끝나고 나니 배가 고팠다. 

나는 빵 트럭을 따라 열심히 달렸다. 

그렇지만 빵 상자는커녕 빵 한 봉지도 떨어지지 않았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그랬다. 

하루하루가 똑같았다. 

어쩌나 다른 날이 있기도 했다. 

그 날 누나와 나는 아침을 굶어야 했다. 

누나가 다니던 공장에서 월급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누나는 울었고 눈이 퉁퉁 부어서 공장으로 갔다. 

나는 수돗물로 배를 채워서 누나처럼 배가 고프지는 않았다. 

그 날 너는 교문 앞 빵집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너는 나를 끌고 빵집 안으로 들어갔다. 


"이거 너 주려고 산 거야." 


너는 김이 나는 찐빵을 내밀었다. 

너는 커다란 암소가 그려진 우유도 주문했다. 

나는 허기가 져서 쓰러질 것 같았지만 먹지는 않았다. 


"먹어 봐." 


"왜 나한테 이러는 거니." 


"그냥 주고 싶어." 


"난 네 부하가 아냐." 


"너 같은 부하 필요 없다." 


그때 온 가게 안에 튀김 냄새가 퍼졌다. 

나는 기름기 많은 튀김을 싫어했다. 

배고플 때 튀김을 먹으면 설사가 났다. 


"저거 먹고 싶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마치 네 것인 양 얼른 튀김을 집어왔다. 

가게 안에 있던 누구도 너에게 뭐라고 하지 않았다. 

나는 그걸 새처럼 조금씩 나누어 먹었다. 

내가 튀김을 먹는 동안 

너는 착한 공룡처럼 눈을 두리번거리면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네가 싫었다. 나도 싫었다. 

너는 튀김을 몇 봉지인가 싸서 가방 안에 넣어 주었다. 

나는 누나 생각이 나서 그냥 가만히 있었다. 

가게를 나오면서 나는 너에게 물었다. 


"이 찐빵 가져가도 돼?" 


너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찐빵도 가방이 터지도록 담아주었다. 

그 날 저녁 나는 찐빵을, 누나는 튀김을 배가 터지도록 먹었다. 

누나는 설사가 나서 그 다음날 공장을 가지 못했다. 

또다시 똑같은 날이 반복됐다. 다른 날은 어쩌다 있었다. 



독서실 안에는 내 자리가 있었다. 네 자리도 있었다. 

내 자리는 고등 학생 반에 있었고 네 자리는 중학생 반에 있었다. 

나는 공부를 하려고 독서실에 갔고 너는 나를 따라 독서실에 왔다. 

너는 독서실에서 공부 같은 건 하지 않았다. 학교에서도 공부를 하지 않았다. 

네가 왜 독서실에 나왔는지 나는 안다. 너는 나를 좇아왔다. 그렇다. 

고개를 숙인 채 멀찌감치 전봇대 뒤에 숨어서 나의 눈을 피하던 

너를 나는 숱하게 보았다. 나는 그런 너를 경멸했다. 

그래도 아이들은 너를 존경했다. 

너를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아이는 아무도 없었다. 

네가 아이들에게 존경을 받는 이유를 나는 몰랐다. 

오월, 아니 사월이던가. 

학교 운동장에 있는 플라타너스 나무가 온몸 가득 새 잎을 피워 올리기 전까지는. 

그 무렵 신체 검사라는 걸 했다. 

신체 검사를 할 때 아이들은 교복 윗도리를 벗고 

바지를 벗고 윗도리 속옷을 벗고 

전날 쯤 목욕탕이나 부엌에서 때를 벗긴 몸을 드러냈다. 

풍선처럼 뚱뚱한 아이들이 있었고 

두부처럼 희고 네모진 아이들이 있었다. 

길고 가는 몸이 있었고 납작하고 포동포동한 몸이 있었다. 

아이들은 서로의 몸에 손톱자국을 내고 간지럼을 태우며 킬킬거렸다. 

그런 아이들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네가 나타났던 것이다. 

너에게는 우리에게 없는, 아니면 드물게 있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그것은 우리가 가끔 실오라기인줄 알고 잡아 뽑는, 

막 돋아나기 시작하는 이상하고 낯선, 어른 냄새가 나는 털이었다. 

그건 겨드랑이의 털이었고 가슴에서 배로, 배에서 

속옷에 가려진 사타구니로 줄달음치는 털의 행렬이었다. 

수백 개의 눈알이 너에게 집중되었고 흩어졌고 다시 들러붙었다. 

반에서 제일 힘센 아이도 어쩔 수 없던 것은 바로 너의 털이었다. 

네가 다른 아이들보다 나이가 많았던가. 그건 모르겠다. 

네가 조숙했던가. 그것도 모르겠다. 

네 생각이나 행동은 다른 아이들과 비슷했다. 

다만 너는 너의 털로 존경을 받았다. 

너는 털로 덮인 이상한 몸을 저울 위에 올려놓았다. 그 다음 차례가 나였다. 

너는 내가 저울 위에 올라갔을 때 나를 흘끗 쳐다보았다. 

"이거 어때 ?" 하고 묻는 듯이. 나는 잠자코 있었다. 내게는 상관이 없는 문제였다. 

너는 내가 너나 너의 털을 존경하지 않는 것을 이상해 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내게 그걸 보여 주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그걸, 다른 아이들이 꿈도 꾸지 못하는 그것을. 

나는 독서실로 가서 한 달 치 출입증을 끊고 여름 방학 동안 거기에서 공부를 했다. 

내가 알기에 지옥을 잊는 방법, 지옥에서 빠져나가는 방법은 공부밖에 없었다. 

나는 공부에 공부에 공부에 공부를 거듭했고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손을 대었다. 

독서실 주인은 내게 고등 학생 반에 들어가도록 허락해 주었다. 

대학 입학 시험을 준비하는 형들 사이에서 더욱 열심히 공부를 하라는 격려와 함께. 

어느 날 네가 나타났다. 너는 반달 치 출입증을 끊었다. 

나는 대학 입시를 준비하는 형들과 함께 있었고 

너는 너를 무서워하는 아이들과 함께 있었다. 

독서실의 중학생반에서는 분유 깡통에 전기를 연결한 젓가락을 집어넣어 

라면 끓이는 기술과 수음 밖에는 공부 할 게 없었다. 

나는 그 곳에 돌아갈 일이 없었다. 

그러므로 어느 날 새벽 세 시에 내가 독서실 옥상으로 가지 않았다면 

나는 여름 방학 내내 너를 만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독서실이 들어있는 건물과 맞붙어 있는 건물의 1 층은 목욕탕이었다. 

한밤까지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살 냄새와 비누 냄새가 건물 뒤편을 돌아 

중학생 반의 중학생과 고등학생 반의 고등학생 코에 닿기도 했다. 

일요일 새벽에 바구니를 든 얼굴이 붉고 머리가 젖은 아가씨와 여인네들이 

막 독서실 셔터를 올리고 집에 돌아가는 우리들과 마주치기도 했다. 

그들은 뜨거운 물에 불린 몸과 마음을 뒤뚱거리며

입 안 가득 거품을 채운 듯이 쉴 새 없이 깔깔거렸다. 

독서실 옥상에서 보이는 건 그 옥상과 똑같이 생긴 이웃 건물 옥상이었다. 

그 옥상에는 작은 방이 있었다. 

작은 방 너머에 전기 철탑이 거인처럼 서서 팔을 벌리고 있었다. 

그 날 새벽달은 굴뚝 위를 넘어간 지 오래되었다. 

지옥의 하늘에서는 원래부터 별을 볼 수 없었다. 

작은 방에 세 든 처녀가 사는 방은 불이 꺼져 있었다. 

처녀는 불을 켜고 자는 버릇이 있었다. 

그 비밀을 아는 사람들은 재수생 형들이었다. 

형들은 옥상으로 가는 계단에 번호 자물쇠를 걸었다. 

번호를 아는 사람은 형들과 총무밖에 없었다. 

나는 형들끼리 하는 이야기를 엿들었고 번호를 알게 되었다. 

그래서 형들이 자는 것을 확인하고 번호 자물쇠를 열고 올라와 본 것이었다. 

나는 독서실에서는 고등학생이었다. 

지옥의 고등학생도 성장을 해야 했다. 

성장을 하려면 불꺼지지 않는 처녀의 방을 엿보아야 했다. 

처녀의 방을 엿보려면 옥상에 가야 했다. 

그 처녀는 그들의 상상이 만든 성 속에 살고 있는 고귀한 공주였다. 

공주는 공장에 다니고 있었고 자기 전에 옷을 모두 벗어제친 채 

머리를 빗으며 노래를 부르는 습관이 있었다. 

못된 계모에 의해 지옥의 탑에 유폐된 모든 공주가 그렇듯이. 

나는 부질없이 손을 저어 불 꺼진 창 쪽으로 흔들었다. 

흔들리는 나의 손을 저주했다. 사방에서 늘어진 끈들이 딱딱 소리를 냈다. 

나는 네가 언제 옥상에 올라왔는지, 언제부터 나를 지켜보고 있었는지 몰랐다. 

너는 전봇대처럼 우뚝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오랜만이다." 


너는 담배를 튀겨 내 쪽으로 날려보냈다. 

네가 긴장을 감추려고 그런다는 걸 나는 알았다.


"너 여기서 뭐 하니 ?" 


나는 물었다. 

마치 먼저 올라온 게 너이고 나중에 올라와서

너의 비행을 모두 목격한게 나이기라도 한 것처럼. 

너는 나를 탓하지 않았다. 


"너를 보러 왔다." 


"왜 ?" 


"기차를 타고 온갖 곳을 다 돌아다녔다. 네가 보고 싶어지더라." 


그러면서 너는 옥상으로 올라오는 문에 쇠를 걸었다. 

나는 지붕의 감옥에 갇힌 셈이었다. 

그래서 네가 말을 걸어오는 것을 잠깐 받아주었다.

하긴 그때 나는 한 번도 기차를 타본 적이 없는 중학생이기도 했다. 


"어디로 ?" 


"은척까지 갔다. 여기에서 은척까지 있는 역마다 다 내렸다. 

은척에서 여기까지 오면서 모든 역에 다 가보았다." 


"바보야, 그 역이 그 역이지 뭐냐." 


웃을 일이 없는데도 웃음이 나왔다. 너도 어색하게 웃었다. 


"저 너머 방에 누가 사니 ?" 


"몰라." 


나는 그전처럼 냉정한 중학생으로 돌아갔다. 서둘렀다. 누가 올지도 몰랐다. 

재수생 형들이 알면 나를 반쯤 죽여 중학생 반으로 도로 돌려보낼지도 몰랐다. 

내가 너를 지나치려고 하자 바보인 네가 감히 내 팔을 잡았다. 


"그냥 갈 거야 ?" 


네 손길에는 소름이 끼치도록 부드럽고 질기고 단호한 힘이 들어있었다. 

그건 사랑에 빠진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것. 


"그래." 


나는 너와 사랑에 빠질 정도로 어리석은 중학생이 아니었다. 

나는 쌀쌀하게 너를 뿌리쳤다. 너는 뜨겁게 호소했다. 


"우리 이야기 좀 하자." 


"할 말 없어." 


우리는 잠시 실랑이를 벌였다. 그런 와중에 네가 헐떡거리며 소근거렸다. 


"그렇게 여자를 보고 싶니 ?" 


"뭘 ?" 


"네가 왜 옥상에 왔는지 안다." 


나는 창피했다. 너에게 화가 났다. 


"내가 보여 줄게." 


"싫다." 


"이따가 목욕탕 문 열면 건물 뒤로 와. 건물하고 담 사이로 좁은 길이 있다. 거기로." 


"안 갈 거다." 


나는 그 자리를 알고 있었다. 

건물 뒤 사람 손이 닿지 않을 정도로 높은 담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했고 그 위에 날카로운 유리 조각이 꽂혀 있었다. 

담과 유리는 담을 넘어 들어가거나 담 위에 올라 창문을 통해 

목욕탕 안을 들여다보려는 저주받을 호기심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었다. 


"다섯 시다." 


너는 그 말만 하고 가버렸다. 나는 손을 씻었다. 씻고 또 씻었다. 

가지 않겠다고 맹 세했다. 

책상에 엎드려 잠을 잤다. 자려고 했다. 

그런데도 웬일인지 나는 새벽 다섯시, 

목욕탕 창문으로 김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할 무렵, 

건물 뒤편 쓰러질 듯이 위태롭게 서 있는 담 아래에 서 있게 되었다. 


"왔구나." 


너는 미리 와 있었다. 너는 담 밑에 있는 판자를 치웠다. 

판자 아래에는 네가 쌓아 놓은 벽돌이 있었다. 

그 벽돌을 딛고 담 위로 올라갈 수 있도록. 


"올라가. 내가 받쳐 줄게." 


너는 나보다 키가 한 뼘은 더 컸다. 

너는 나보다 두 배는 더 힘이 셌다. 

네가 받쳐 주면 될 것이다. 

네가 올려 주면 될 것이다. 

네가 믿음직하고 성실해 보일수록 부끄럽고 창피한 느낌이 커졌다. 

그래서 나는 다른 핑계를 찾았다. 


"담 위에 유리가 있잖아." 


목욕탕 뒤편 창문은 담보다 더 높았다. 

담에 올라서야 안이 보이는데 그 담 위에는 유리가 박혀 있는 것이다. 

나는 기껏 호기심이나 채우자고 엉덩이가 찢어질 위험을 감수할 생각은 없었다. 


"내가 치워놨어." 


그랬다. 

너는 몇 시간 전부터 미리 그 곳에 와서 담 위로 올라간 다음 

한 사람이 앉을만한 자리만큼 유리를 부수어 놓았다. 

네가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들키지 않으려고 얼마나 조심했는지, 

왜 그런 일까지 했는지 내가 생각하는 동안 너는 문득 내 발을 받쳐 올렸다. 

나는 얼떨결에 담 위에 올라갔다. 올라탔다. 네가 밑에서 말했다. 


"보이지 ?" 


보이지 않았다. 목욕탕 안은 김으로 꽉 차 있었다.

김 속에서 어른거리는 것이 사람인지 고깃덩어리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게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구별할 수 없었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안다고 해도 

옷을 벗고 있는지 입고 있는지 벗는 중인지 입는 중인지도 알 수 없었다. 

내가 고개를 흔들자 밑에서 안타까워하던 네가 마침내 담으로 올라왔다. 

너는 대포처럼 김을 쏟아 내는 목욕탕 창문을 보고는 내게 사과했다. 


"다음에 오면 괜찮을 거야. 오늘은 재수가 없구나." 


뾰족한 유리 위에 커다란 엉덩이를 

힘겹게 걸친 네게 나는 괜찮다고 대답해 주려고 했다. 

네가 미안해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해 주려고 했다. 

다시는 이따위 담 위에서 너 하고 참새처럼 나란히 앉지 않겠다고 말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럴 틈도 없이, 


"네, 네, 네이 요놈들 !" 


소리치며 목욕탕 안쪽에서 누군가 뛰어나왔다. 

새벽의 희붐한 빛 속에서 손에 망치를 든 누군가. 

나는 허둥대다가 구두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내 구두 !" 


누나가 사준 구두. 다 떨어졌지만 단 하나뿐인 내 구두. 

너는 나를 담 바깥으로 떠다밀었다. 

나는 담 밖으로 떨어져서도 구두, 구두를 외쳤다. 

네가 담 안쪽으로 떨어지는 걸 보고 절름거리며 도망쳤다. 

너는 엉덩이를 유리에 찢겼다. 망치에 정강이뼈를 맞았다. 

그렇지만 내 구두처럼 담 안으로 떨어진 건 아니다. 

네가 뛰어내렸다. 

너는 주인에게 허리를 잡혔고 뺨을 맞았고 주인의 의기양양한 욕설을 

들어가며 구두를 찾았고 찾고 나서는 주인을 떠밀어 나동그라지게 했고 

구두를 들고 우리 집 대문 앞으로 나를 찾아왔다. 네가 말했다. 


"미안하다." 


생각해 보면 나는 지금까지 너에게 한 번도 미안하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 

미안하다는 말은 모두 네 차지였다. 

나는 구두 한 짝을 건네 받았고 고맙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단 한마디 말만 했다. 


"너는 ?" 


너는 말없이 무릎까지 바지를 걷어 내게 보여 주었다. 

발목에서 무릎까지 시퍼렇게 멍이 든, 털이 무성한 네 다리를. 

나는 돌아섰다. 그리고, 


"미안하다." 


그 말이 네 입에서 나왔다. 


"다음에 더 멋있는 걸 보여 줄게." 


그 말도 너의 입에서 나왔다. 



어제의 어제는 어제의 오늘과 같았다. 

빵 공장에서는 오전 열 시만 되면 김이 솟아 올랐다. 

김에는 빵이 익을 때 나는 고소하고 시큼한 냄새가 섞여 있었다. 

그 냄새는 공장 근처 하늘을 연처럼 돌아다니다가 점심 시간 직전에 

교실로 흘러 들어 아이들의 뱃속을 간지럽혔다. 

아이들은 빵과 원수가 져서 빵만 보면 미친 듯이 달려들어 먹어 치우려고 했다. 


"너, 빵집 계집애 알지." 


교문 앞 빵집의 여자아이는 네 말처럼 계집애가 아니라 

중학교를 졸업하고 집안일을 돕고 있는 처녀였다. 

그 처녀를 모르는 아이들은 없었다. 

학교를 갔으면 아마 고등학교 2학년? 

그 처녀는 늘씬하고 아름답고 가슴이 불룩 솟았고 잔소리가 심했고 

중학생들이 자신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했다. 

그 처녀 앞에서는 가장 싸움을 잘하는 아이를 포함해서 

그 누구도 꼼짝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원수 같은 찐빵만 배가 터지도록 먹는 수밖에 없었다. 

언제든지 아이들을 얼려버릴 수 있는 그 차디찬 눈길, 

경멸과 권태로 가득한 표정, 쌀쌀하고 매운 손길. 

그런데도 그 가게 앞을 그냥 지나쳐 갈 수 있는 아이들은 거의 없었다. 

학교 변소에 있는 낙서들, 

거기에서 가르치는 그녀의 아름다움, 호색성, 

냉혹함의 신화는 아무것도 모르는 1 학년 아이들조차 

거부할 수 없는 은밀한 빵 배급과 같았다. 


"난 계집애들한테 관심 없어." 


나는 그렇게 말했다. 

내 대답에 거짓이 섞이기는 했지만 거짓만큼 진실도 섞여 있었다. 

그때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던 사람은 변소에서 

그 처녀와 비슷한 빈도수로 발견되는 이야기의 주인공인 음악 선생이었다. 


"그거 내가 먹었다." 


거짓말. 그 처녀에게서는 늘 드라이 아이스처럼 찬 김이 뿜어져 나왔다. 

아이들이 빵가게 앞에서 일없이 조금 머뭇거리든가, 

살짝 들여다본다든가 하면 당장 용암과 같은 욕설이 터져 나왔다. 

그 욕설의 첫 대목이나 마지막 대목을 장식하는 말은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새끼들' 이라는 말이었다. 매일 똑같았다. 

그런데 그 마녀 같은 처녀를 처먹어 ? 

가을이 되자 딴 세상처럼 너와 내가 사는 세상에도 바람이 자주 불었다. 

집 근처 예전 과수원 자리에 몇 그루 안남은 

배나무에는 작고 뻔뻔스럽게 생긴 배가 열렸다. 

곧 그 나무도 배도 쓰레기에 묻힐 운명이었다. 

너는 나를 따라왔다. 항상 내 주변에 어른거렸다. 


"걔를 좋아해 ?" 


나는 그 처녀를 잘 몰랐다. 질투 같은 건 하지도 않았다.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런데도 너는 뽐내며 말했다.


"나는 관심이 없는데 그 계집애가 자꾸 따라다니거든. 

그런데 걔는 꼭 구멍난 속옷을 입는다 ? 

너 좋아하면 하나 갖다 줘 ?" 


네가 그럴 때마다 나는 너를 경멸했다. 벌레 먹은 배가 떨어졌다. 

내가 가려고 하자 너는 초조해 했다. 


"너한테 걔 먹는 걸 보여 줄까." 


나는 네 눈을 들여다보았다. 


"네 맘대로 해." 


너는 풀이 죽었다. 그래도 끈질기게 속삭였다. 


"내일 시험 끝나면 곰바위로 와줄래 ?" 


나는 집에 와서 손을 씻었다. 네 말 같은 건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런데도 내가 시험을 마치고 곰바위로 간 건 무엇 때문이었을까. 

곰바위는 이따금 어른 남녀가 이상한 짓을 벌인다는 소문이 나있는

학교 뒷산의 으슥한 곳이었다. 나는 그 전날 밤에 한잠도 자지 못했다. 

시험 준비하느라 밤을 새우려고 했다. 

그렇게 해서 다시 1 등을 차지하려고 했다. 

지옥을 빠져나가는 1 등석 기차표를 얻으려고 했다. 

너는 공부를 못하면서, 공부를 잘 할 생각도 없으면서 

내가 왜 공부를 하는지도 모르면서 공부 잘하는 나를 따라다녔다. 

어른에 가까우면서 아이와 가까운 나를 좋아했다. 

어쩌면 내가 너의 잘난 것 어느 한 가지라도 존중해 줄 수 있다면 

너의 맹목적인 헌신에 대한 빚 갚음이 될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지옥에서도 나는 성장해야 했다. 

내가 가방을 든 채 바위 위로 올라갔을 때 너는 없었다. 처녀도 없었다. 

나는 바위 위에 누워서 내가 왜 거기까지 왔는지를 생각해 봤다. 

누나가 처음으로 탄 월급으로 사준 단벌 구두까지 신고, 

그 구두의 콧등까지 까져 가면서. 내가 네 말을 믿다니. 

나는 지옥의 가을 햇빛 아래에서 혼자 웃었다. 속아 준 것으로 빚은 없다. 

와준 것으로 깨끗해졌다. 나는 돌아가려고 했다. 그때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나는 바위 위에 납작 엎드렸다. 그냥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그 목소리가 너의 것인지 다른 사람의 것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굵어서 알아들을 수 없는 남자의 목소리에 이어 

"추워" 하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을 때 

내 가슴속에 다른 가슴이 들어 있어서 격렬히 다투는 것처럼 쿵쾅거렸다. 

그리고 곧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수 있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내가 난생 처음 들었음에도. 

그건 남자와 여자의 피부 가운데 가장 연약한 부분이 맞닿아 나오는 소리였다. 

쯔읍, 하고 길게 끄는 소리. 

짭짭, 하고 연속적으로 나는 소리.

쭈욱, 하고 무엇인가 잡아당겨지는 소리. 

나는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 다음부터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빵 냄새 비슷한 시큼한, 시궁창처럼 더러운, 

목욕탕 김처럼 수상한 냄새가 한꺼번에 덤벼드는 것 같았다. 

바위 위에서 내려다보이는 교정은 너무도 조용했다. 

플라타너스들은 장난감 병정처럼 씩씩했고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들려 왔다. 

나는 바위 밑 에 있는 사람들이 가버렸기를 바랐다. 

그들이 갔으면 나도 가리라 했다. 

아무도 없는 교정 한모퉁이에서 음악 선생의 노래를 들으리라. 

그전처럼 알 수 없는 감정이 북받쳐 목이 메일지도 몰랐다. 나는 고개를 내밀었다. 

아무도 없으면 바위에서 내려가려고. 

그런데 바위 밑에서 무엇인가 움직이고 있었다. 

그건 누군가의 엉덩이였다. 

그 엉덩이가 네 것인가. 

나는 너에게 물어 본 적이 없다. 

네가 나에게 그때 곰바위에 와보았느냐고 묻지 않았듯이. 

다만 그 엉덩이 아래에 길고 매끈한 두 다리가 더 뻗쳐 있던 것을 기억한다. 

나는 눈부시다 못해 아픈 햇빛을 반사하는 아래에 깔린 흰 다리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뒤에서 누군가 발을 잡아당기는 것 같아 나는 딸려 가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앞에서 누군가 끌어당기는 것 같아 끌려가지 않으려고 기를 썼다. 

행여 떨어질까 싶어 모자를 움켜쥐었다. 그 동안 다리의 모양이 바뀌었다. 

다리의 임자 얼굴이 드러났다. 그건 눈을 감고 있는 빵집의 처녀였다. 

머리칼이 흐트러진 처녀였다. 그 처녀의 다리가 흔들리고 앙다문 입술이 흔들렸다. 

내 입에서는 단내가 났다. 눈앞에 엄청난 밝기의 전구가 켜진 듯했다. 

확실치는 않다. 확실치 않아. 그 처녀가 언제 눈을 떴던가. 

나와 눈을 마주치기까지 얼마나 오랫동안 눈을 감고 있었던가. 

오오오, 나는 돌이 굴러내려 내가 보고 있었다는 것을 들키고, 

소리가 나서 놀란 두 사람이 떨어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떨어지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뛰어내려, 긁히고 찢기는 것도 모르고 

수백 미터 산길을 뛰어내려갔다. 

그녀의 눈은 집에까지 따라오고 꿈속까지 따라오고 

내가 처음 여자와 자던 20 대의 어느 날까지 나를 따라왔다. 

어쩌면 지금까지도 가끔 따라온다. 따라 온다, 그 눈이. 

나는 사랑에 빠졌던 것이다. 바로 그 처녀의 눈에 빠졌다. 

놀람과 분노와 당혹감을 한껏 떠진 눈으로 총알처럼 쏘아 보내던 눈빛. 

희고 검은 부분의 경계선이 지금도 손으로 그릴 수 있을 만큼 뚜렷한 그 눈. 

동그란 눈. 흡뜬 눈. 



그 날 이후 매일 똑같았다. 

나는 너를 상대하지 않았고 그 처녀는 중학생을 상대해 주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 떨어져서 도는 행성과 같았다. 

너는 슬픔에 잠겨 네 맘대로 했고 나는 시름에 겨워 내 마음대로 했다. 

너는 퇴학을 당했고 나는 지옥에서의 마지막 시험을 치렀다. 

네가 사라지고 나서 그 처녀도 사라졌다. 

졸업식을 하기 전에 숫자가 적힌 종이 조각을 나누어 받았다. 

그 번호를 가지고 추첨을 해서 진학하게 될 고등학교를 정한다고 했다. 

공고나 상고, 또 지옥의 특수지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된 아이들은 

그런 종이 조각 따위는 받지 않았다. 

불합격자에게는 당연히 그런 종이 조각이 돌아가지 않았다. 

그러니 학교를 중퇴하고 검정고시도 보지 않았으며 

공고나 상고에는 관심도 없는 네가 그 종이 조각을 나누어주는 특정한 날, 

특정한 장소에 나타난 것은 이상한 일이기는 했다. 

나는 종이 조각을 받자마자 교실 밖으로 뛰쳐나갔고 

해방의 포만감으로 누나처럼 뚱뚱해지고 두 뼘은 키가 커져서 운동장을 달렸다. 

빵집 간판이 넘겨다 보였을 때 잠시 멈추었지만, 

사랑은 다 그런 법이라는 노래 가사를 떠올렸을 뿐. 


그때 햇빛을 받으며 걸어오는 너를 보았다. 

너는 두껍고 커다란 외투를 입고 보기에도 

멋진 모자를 쓰고 있어서 딴 세상에서 온 부자처럼,

기관사나 뱃사람이나 비행사, 우주인처럼 보였다. 


"어디 가니?" 


"너는?" 


우리는 운동장에서 마주섰다. 네가 천천히 다가왔다. 

너를 보는게 마지막이라는 느낌이 든 건 왜였을까. 

네 얼굴을 비추는 노란 햇빛은 내가 가게 될 다른 좋은 세상에서 오는 것 같았다. 

해를 등지고 있는 내 몸에서 뻗은 그림자는 짧고 짙었다. 


"한 번 안아 보자." 


"그래." 


나는 처음으로 너를 받아들였다. 

네가 나를 안았던 팔을 풀고 외투 단추를 풀면서 말했다. 


"너, 다시는 안 오겠구나." 


"그래." 


너는 외투를 벌렸다. 나는 마지막으로 네 품안에 스며들었다. 


"사랑한다." 


너는 나를 깊이 안았다. 


"나도." 


지나가던 아이들이 우리를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지옥의 공장에서 빵 트럭이 쏟아져 나오고 

딴 세상 바다에선 고래들이 펄쩍 뛰어오르던 그때,

나는 비로소 내가 사내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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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2

김사과, 나와 B

2019. 2. 13. 20:42

나와 b는 쌍둥이다. 아니 진짜 쌍둥이는 아니다. 근데 맨날 붙어 다녔더니 진짜 쌍둥이가 되었다. 우리는 노래도 지었다. 우리는 노래도 지었다. 우리는용감한쌍둥이형제엄마배를가르고나온우리엄마는배가찢어져서죽었다네 우리는 어디서나 그 노래를 부르고 다녔다. 나는 미미 b는 슈슈를 들고 있었다. 사람들은 우리의 노래를 싫어했다. 사람들은 우리를 싫어했다. 그러나 괜찮았다. 우리는 아주 명랑했다. 우리는 아주 건방졌다. 우리는 꿈이 있었다. 우리는 온 세상을 차지하고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들을 다 죽일 생각이었다. 옛날 이야기다.


 


*


 


 난 네가 없으면 죽을지도 몰라. b가 내게 말했다. 첫사랑도 나한테 똑같이 말했어. 내가 말했다 근데 결국 안 죽었어. 지금도 멀쩡히 살아 있다니까. 아냐 죽을 거야. b가 말했다. 내가 죽일 거야. 어쨌든 나는 그 뒤로 내 첫사랑을 보지 못했다.


 


*


 


 어떤 날 나와 b는 아주 사이가 좋다. 우리는 같은 냄새를 풍긴다. 식당에 가면 같은 것을 시킨다. 같은 빨대를 핥아먹는다.


 


*


 


 이제 나와 b는 더 이상 어린이가 아니다. 어른도 아니고 엄마도 아니다. 아빠도 아니고 선생님도 아니고 대학생도 아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는 거지도 아니며 부자도 아니고 천사를 본 적도 없고 전쟁을 겪은 적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지루하다. 매우 몹시 지루하다. 지루하다. b가 가로등에 돌을 던지면서 말했다. 불이 꺼지고 검은 밤 속에서 불꽃과 연기가 피어났다. 심심하다. 나는 자판기를 부쉈다. 나는 바퀴벌레가 가득 든 커피와 설탕을 바닥에 뿌리고 물을 섞어 커다란 커피 웅덩이를 만들었다. 그 위로 택시가 지나갔다. 택시 바퀴가 커피를 밟고 커피를 마시며 달려갔다.


 그날밤 어디에서나 커피 냄새가 났다. b가 재채기를 하더니 나를 때렸다. 힘에 세지고 싶다. 나는 생각했다. 남자애들처럼 힘에 세지고 싶다 나는 말했다. 권투를 배우자. 그래 배우자. 힘이 세지자. 하지만 돈이 없는데. b의 눈썹이 가라앉았다. 네 눈썹은 엄청 이쁘다. 내가 말했다. 그러니까 권투선수를 꼬시는거야. 그러니까 내 이쁜 눈썹으로? 응, 어때? 자신있지. 일주일 뒤 우리는 만났다. b는 전직 유도선수의 뺨을 핥고 있었다. 나는 권투도장에 다니는 깡패랑 팔짱을 끼고 줄담배를 피우며 길바닥에 침을 뱉고 있었다. 안녕. 안녕. 우리는 인사했다. 전직 유도선수는 머리에 필승이라고 씌어진 머리띠를 하고 있었다. 깡패는 반짝이는 검은 정장을 입고 있었다 미안, 권투도장이 너무 멀어서 집 근처 유도학원에 가봤어. b가 말했다. 아냐, 괜찮아. 내가 대신 해냈어. 내가 말했다. 아냐, 걔는 깡패잖아. b는 냉정했다. 그래서 나는 울었다. 권투할 줄 아세요? b가 깡패에게 물었다. 조금요. b가 깡패에게 물었다. 조금요. 깡패가 대답했따. 보여주세요. 깡패가 소매를 걷었다. 그러자 그의 팔에 가득 새겨진 멋진 문신이 햇살을 받아 반짝거렸다. 깡패는 강아지처럼 가볍게 튀어올라 멋진 잽과 훅을 보여주었다. 우리는 모두 박수를 쳤다. 전직 유도선수도 브라보를 보냈다. 그럼 이제 당신 차례예요. b가 전직 유도선수에게 말했다. 전직 유도선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말했다. 뜨거운 기술을 보여주세요. 버터처럼 부드러운 걸로요. 아아. 당신의 기합소리를 내 귀에다가 속삭여주세요.


 


*


 


 어떤 날 나와 b는 사이가 나빠졌다. 그래서 나는 깡패와 놀기 시작했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깡패와 놀았다. 깡패의 몸은 튼튼했고 문신은 반짝거렸다. 나는 깡패가 좋아졌다. 어느날 깡패가 나에게 본드 부는 법을 알려주었다. 우리는 옷을 다 벗고 나란히 손을 잡고 누워 비닐봉지를 뒤집어썼다. 비닐봉지는 흰색이고 롯데마트라고 씌어 있었다. 우리는 온 얼굴에 본드가 범벅이 되어 이천원짜리 천국으로 갔다. 천국은 티타늄화이트였다. 나는 천국에서 b를 만났다. b는 초콜릿 상자에 들어 있었다. 나는 상자를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가려고 다리를 벌렸다. 깡패가 페니스를 내 몸속에 밀어넣었다. b가 녹아서 사라졌다. 우리는 동시에 끙, 하고 신음소리를 냈다. 모두가 대만족이었다. 이천원짜리 천국은 두 시간 후 온 얼굴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아주 작은 문제였다. 깡패가 본드를 또 하고 싶다면서 울음을 터뜨렸다.


 


*


 


 어느날 깡패가 나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다. 나는 기뻤다. 나도 사랑해요 당신을요. 우리는 체리소주를 마셨다. 깡패가 말했다. 나 때문에 당신과 b의 사이가 더 나빠지는 것 같아서 미안해요. 아니에요. 아니에요, 너무 미안해요. 괜찮아요, 너무 미안해하지 마세요. 아니에요, 정말 미안해요. 아니에요. 아니에요. 아니에요, 미안해요. 미안해요. 미안해요. 미안해요. 깡패는 너무 미안했다. 너무 미안해진 깡패는 나를 때렸다. 나는 얼굴을 가리고 엉엉 울면서 도망쳤다. 그리고 다음날 마스크를 쓰고 b를 찾아갔다. 안녕. 안녕. b는 나를 별로 반가워하지 않았다. 나는 재빨리 마스크를 벗었다.


 


*


 


 우리는 화해했다. 나는 깡패와 헤어졌다.


 


*


 


 b는 샤넬에서 일했다. 그것은 술집의 이름이었다. b는 구찌에서 일한 적이 있었다. 그것은 커피숍의 이름이었다. 샤넬 옆에는 커다란 공원이 있었다. 공원 꼭대기에서는 서쪽 바다가 내려다보였고 할아버지 할머니와 거지와 미친 사람들이 있었다. 할아버지들은 공원 입구에 박정희의 사진을 걸어놓고 절을 했다. 할머니들은 집 뒷마당에다 양귀비를 키웠다. 할머니와 할아버지 들은 샤넬의 화장실에서 쎅스를 했다. 거지들은 맨홀 뚜껑을 훔쳐다 팔았다. 미친 사람들은 맨홀 속에 빠졌다. 어느날 맨홀에서 미친 사람이 굶어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불쌍한 미친 사람은 너무 배가 고파 소매 끝을 갉아먹었다. 미친 사람들은 언제나 웃으면서 화를 내고 신발을 잃어버리고 점퍼를 세 개씩 입었다. 피부병에 걸린 개가 매일 밤 벚꽃나무 밑에 누워 울었다. 매일 밤 나는 공원 입구 벤치에 앉아 b를 기다리며 이 모든 것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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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원 입구 벤치에 앉아 있으면 할아버지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할아버지와의 대화는 언제나 지루했다. 할아버지가 말했다. 내 아들은 서울대 법대를 나왔다. 너는 어느 대학에 다니느냐. 내가 대답했다. 나는 대학에 다니지 않습니다. 내 딸은 연대 경영학과에 다니고 씨티은행에서 인턴을 한다. 너는 뭘 하느냐.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내 손자는 하바드와 스탠퍼드에 동시에 합격하는 것이 꿈이다. 너는 꿈이 뭐냐. 나는 아무런 꿈도 없습니다. 그러면 할아버지는 실망하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면 나는 조금 쓸쓸해졌다. 쓸쓸해진 나는 할아버지 그 개새끼가 미웠다. 언젠가 그 개새끼한테 복수할 거라고 굳게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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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샤넬의 사장님은 서울에서 왔다. 서울 이야기를 하도 많이 해서 우리는 그를 서울아저씨라고 불렀다. 서울dkwjTL는 한 달에 한 번씩 서울에 갔다. 내가 이번에 서울에 가서는 말이다. 서울아저씨가 말했다. 프랑스인과 같은 식탁에서 싱가포르 쌘드위치와 타이거 맥주를 마셨다. 그럴 때 나는 봉주를 꼬망딸레부라고 말한다. 그 정도는 세련된 서울 시민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다고 한다. 나도 세련된 서울 시민이 되고 싶다. 프랑스어를 배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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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을 열면 풍겨오는 오래된 맥주 냄새와 닭튀김 냄새는 언제나 똑같고 더럽고 푹신한 의자와 썩어서 흔들리는 나무칸막이가 바로 샤넬이다. 저기 카우보이모자를 살짝 눌러쓰고 칵테일 컵을 닦는 아가씨가 바로 나의 b다. 내 모자 이쁘지, 훔쳐왔어. b는 내가 묻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말했다. 경찰에 신고할 거야. 내가 대답했다. 뻥치시네. 진짜야 할 거야. 만화책이나 내놔. 그게 니 꺼니. 응, 내꺼야! 그렇구나 몰랐어 미안해. 아니야 괜찮아. 삼번 테이블에서는 멋진 남자가 멋진 여자에게 말하고 있었다. 멋진 남자의 입에서 닭고기가 튀어나와 멋진 여자의 손등에 달라붙었다. 나는 얼른 고개를 돌려 텔레비전을 보기 시작했다. 카우보이모자를 쓴 가수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b가 그걸 보더니 소리를 꺅 지르며 텔레비전을 향해 달려갔다. b는 텔레비전을 흔들기 시작했다. 이 새끼야 내 모자 내놔! b의 머리에 카우보이모자가 텔레비전 속에도 카우보이 모자가 있었다. b의 모자는 파란색이었고 텔레비전 속 모자는 빨간색이었다. 사장님 텔레비전에 물을 좀 뿌려도 될까요? 우리는 모두 b가 너무너무 심심해서 그런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저 나쁜 자식을 녹여 없애버리겠어. 그때 b와 같이 일하는 남자 고등학생이 가게로 들어왔다. 남자 고등학생은 고등학교에서 공부하는 대신 술집에서 일했다. 누나 거기서 뭐 해요. 남자 고등학생이 이쑤시개처럼 세운 머리를 b에게 들이대며 물었다. 누나 취했구나. 누나는 술주정도 귀여워요. 근데 누나 팬티 보여요. b가 말했다. 너 싸구려 젤 좀 머리에 바르지 마. 고약한 냄새에 편두통이 생기겠다. 누나 전 젤 안 써요. 전 일제 왁스 써요. 니 머리는 마룻바닥이 아냐. 누나 왁스 몰라요? 누나 머리에 바르는 왁스가 뭔지 몰라요? 너 나한테 왜 존댓말 쓰냐. 너 나한테 유감 있냐. 아니에요 누나. 너 나한테 왜 누나라고 부르냐. 너 나한테 유감 있냐. 아니에요. 누나 왜 그래요. 누나. 이새끼가. 에이 누나 삐쳤구나. 누나. 화내지 마요. 싫다. 에이 누나. 남자 고등학생이 b의 팔을 잡고 흔들며 주문처럼 누나를 외쳤다. 누나! 누나. 누나! 누나. 누나! b는 정말 기분이 언짢아졌다. 기분이 언짢아진 b가 텔레비전에서 손을 떼고 카우보이 모자를 바에 내려놓았다. 우리는 모두 겁에 질렸다. 그게 다 남자 고등학생 때문이었다. 하지만 남자 고등학생은 계속해서 누나라고 말했고, 나머지는 더욱더 겁에 질린 채 b를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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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곱시 반에 젊은 여자가 와서 소주 세 병을 마시고 갔다. 여자는 말했다. 나는 스무살입니다. 나는 여자입니다. 나는 재수생입니다. 나는 오늘 학원에 갔습니다. 나는 대학에 가고 싶습니다. 나는 죽고 싶습니다.


여덟시 반에 젊은 남자가 와서 소주 세 병을 마시고 갔다. 남자는 말했다. 나는 스물세살입니다. 나는 남자입니다. 나는 대학생입니다. 나는 오늘 학교에 갔습니다. 나는 친구가 하나도 없습니다. 나는 학교에 다니기 싫습니다. 나는 죽고 싶습니다. 나는 학교에 다니기 싫습니다. 나는 죽고 싶습니다. 나는 학교에 다니고 싶습니다. 나는 죽고 싶습니다.


아홉시 반에 젊은 여자와 젊은 남자가 와서 소주와 맥주를 열 병 마시고 갔다. 여자와 남자는 말했다. 우리는 노래방에서 만났습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합니다. 우리는 결혼한고 싶습니다. 우리는 돈이 없습니다. 우리는 죽고 싶습니다.


열한시 반에 나이 든 남자가 와서 소주 한 병을 마시고 갔다. 남자는 말했다. 나는 회사에 다닙니다. 나는 딸이 있습니다. 나는 돈을 벌어야 합니다. 내 딸을 미국 대학에 보내야 합니다. 나는 빚이 많습니다. 나는 오늘 회사에 갔습니다. 나는 죽고 싶습니다.


새벽 두시에 술집이 문을 닫을 때까지 죽고 싶은 사람 아홉 명과 살고 싶은 사람 아홉 명 다 합쳐서 아홉 명이 샤넬에 왔다 갔다. b가 마지막으로 역시 술에 취한 죽고 싶은 남자를 내 쫓고 샤넬의 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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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공원 입구 벤치에 앉아 b를 기다리고 있었다. 깡패에게서 전화가 왔다. 깡패는 울면서 내가 너무 보고 싶다고 말했다. 나도 깡패가 보고 싶었다. 우리는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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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b는 오래된 숲으로 소풍을 갔다. 숲에는 연두색 초록색 갈색 빨간색 검정색이 다 있어서 중학생이 열심히 그린 수채화 같았다. 우리는 숲 위에 누웠다. 햇살은 두터운 스웨터였다. 햇살은 우유를 듬뿍 넣은 바닐라 아이스크림이었다. 햇살은 인적 없는 바닷가의 파도였다. 햇살은 포근하고 사르르 녹고 조용하고 파란색이었다. 스웨터 아이스크림 파도가 우리의 창백한 팔을 쓰다듬었다. 이런 날에는 볕이 잘 드는 창가, 커튼을 활짝 열고 정신이 나갈 때까지 창밖을 바라보는 거야. b가 말했다. 나는 졸려서 눈을 감았다. b가 일어나 숲속으로 기어들어가기 시작했다. 쓰레기가 너무 많아. b가 중얼거렸다. 비닐봉지종어컵신발밑창비닐봉지또비닐봉지씨발!나뭇가지에 찔렸어! 그러나 b는 계속해서 열심히 기어갔다. 여기는 어둡고 축축해. 너무 멀리 가지 마. 나는 일어났다. 그럼 나 무서워. 나도 b를 따라 기어가기 시작했다. 우리는 구멍 난 철조망을 헤치고 깻잎 밭으로 들어갔다. 깻잎 냄새가 너무 진해서 숨이 안 쉬어져. 내가 말했다. 깻잎들이 너무 파래서 내가 빨개지는 것 같아. b는 대답하지 않았다. 길가에는 부끄러운 들꽃들이 옆에서 옆으로 몸을 흔들고 있었다. b는 대답하지 않았다. 길가에는 부끄러운 들꽃들이 옆에서 옆으로 몸을 흔들고 있었다. b는 개처럼 엎드려 킁킁 냄새를 맡았다. 나는 b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쉿! b가 내 손을 잡았다. 저기 미친 여자가 이리로 걸어오고 있어. 나는 고개를 들어 미친 여자를 보았다. 여자는 웃으면서 화를 내고 있었고 신발이 없었고 점퍼를 세 개 껴입고 있었다. 과연 미친 여자였다. 여자의 손에는 롯데마트의 비닐봉지가 들려 있었다. 여자는 주머니에서 쓰레기를 꺼내 비닐봉지에 담그고 다시 비닐봉지에서 쓰레기를 꺼내 주머니에 담았다. 그리고 그것은 롯데마트 비닐봉지였다. 나는 그것밖에 보지 못했다. 나는 깡패가 보고 싶어졌다. 그러자 눈물이 났다. 그러자 b가 나한테 미친년이라고 했다. 내가 왜 미쳤어? 나는 소리쳤다. 나는 신발도 신고 있고 울 땐 울고 웃을 땐 웃어. 내가 왜 미쳤어? 나는 점퍼를 딱 하나만 입고 있어. 그런데 내가 왜 미쳤어? b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왜 미쳤어?b가 깻잎을 잡아 뜯기 시작했다. 뭐 하는 거야? 도둑질이야. 도둑질은 나쁜 짓이니까 훔치는 거야. b가 눈을 반짝였다. 그리고 미친 여자를 향해 깻잎을 뿌리며 달려가다가 돌에 걸려서 넘어졌다. 나는 웃었다. 봐, 너는 울다가 웃잖아. 그러니까 미쳤다는 거야! b는 일어났다. b앞에 미친 여자가 있었다. b가 미친 여자를 보고 미소지었다. 안녕하세요. 악! 미친 여자가 두 팔을 하늘을 향해 쭉 뻗고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여자가 놓친 롯데마트 비닐봉지가 바람을 타고 하늘로 날아올랐다가 천천히 천천히 내려앉았다. b는 도망치는 미친 여자를 향해 더러운 욕을 허부었다. 나는 롯데마트 비닐봉지를 주워서 주머니에 넣었다. 나는 깡패가 보고 싶었다.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내 인생이 너무 좆같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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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서 내려온 우리는 모든 상점이 문을 닫은 판자촌을 지나 판자촌 옆에 들어선 새 래미안과 새 자이를 지나 편의점에서 가야 토마토농장을 사서 나누어 마신 다음 김밥천국에 가서 김밥을 먹었다. 우리는 중국산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중국산 플라스틱 젓가락으로 중국산 쏘시지가 들어간 김밥을 중국산 단무지와 중국산 김치와 함께 먹었다. 천국에 김밥천국이 있다고 생각해봐. b가 말했다. 아니면 김밥천국이 진짜 천국이라고 생각해봐. 그것은 중국식 대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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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깡패는 다시 만났다. 우리는 택시를 타고 깡패가 살고 있는 뉴타운모텔 203호로 갔다. 문을 열자 니스 냄새가 났다. 나는 방 한구석에 흰색 페인트통이 뚜껑이 열린 채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깡패를 보았다. 깡패가 서랍을 열었다. 서럽에는 본드가 가득 쌓여 있었다. 훔쳐왔어. 깡패가 웃었다. 우리 형이 철물점을 한다. 나도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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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냄새가 뭐냐 하면…… 세탁소 냄새 같은거…… 약국 냄새 같은……거……드라이클리닝 냄새……씰리콘본드냄새……에폭시본드 냄새……스틸본드 냄새……니스 냄새……벤젠 냄새……휘발유 냄새……나프탈렌 냄새……바퀴벌레약 냄새……감기약 냄새……박카스 냄새……토끼코크 냄새……록타이트 냄새……알테코 냄새……블리치……진짜 멋진 블리치 냄새……시너 냄새……테리핀 냄새……매니큐어 냄새……아세톤 냄새…… 바센린 냄새……씰리카겔 냄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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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지………………금……………………………………무…………슨………………말………………을……………………하………………그………………러…………니까…………내…………가………………지……그…………러 니…………까………………그…………러……………………니…………까…………내…………가…………하…………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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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에 한 번 서쪽 항구에 중국에서 온 배가 도착했다. 그러면 삼일 뒤 할머니와 할아버지 들은 반짝거리는 눈동자로 새벽까지 공원에서 떠나지 못했다. 할머니 할아버지 들은 눈을 반짝거리며 거지 미친 사람 들과 다 함께 밤새도록 기분이 좋았다. 어느날 공원 입구 벤치에 앉아 b를 기다리다가 회색 모자를 쓰고 등에는 작은 배낭을 메고 공원을 빠져나오는 깡패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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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깡패가 본드를 끊었다. 깡패의 눈은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쉽게 화를 내고 아주 빨리 말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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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때과학시간에오징어를해부했는데갑오징어고무장갑초고추장선생님이오징어를잡더니눈똑바로뜨고봐라이게바로오징어의눈이다부루스타스뎅냄비나무도마냄비에물을붓고끓이는데냄새가아주반장엄마가초고추장을만들어와서먹는데음음음음음음음음음음그뒤로나는내가오징어를좋아한다고생각했어그뒤로칠년동안이나좋아한다고오징어를진짜나사실은오징어를싫어하는데진짜오징어오징어오징어지금도오징어만생각하면오징어죽도록화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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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매일 깡패를 만났다. 매일 깡패를 만나서 본드를 불었다. 하루종일 본드를 불었다. 슬픔도 배고픔도 기쁨도 배고픔도 분노도 슬픔도 실망도 희망도 배고픔도 모두 본드 냄새를 풍기기 시작했다. 밤이 되면 깡패가 나를 샤넬 앞까지 데려다주고 검은 자동차가 도착해서 그것을 타고 어디론가 갔다. 나는 흘러내린 본드처럼 벤치에 딱 달라붙어서 점퍼를 세 겹 입고도 덜덜 떨면서 신발이 벗겨진지도 모르고 재채기를 하다가 갑자기 아무 이유도 없이 무서워져서 꽥꽥 소리질렀다. b가 나오면 우리는 함께 버스정류장으로 갔다. 버스가 오면 나는 얼른 버스에 올라탔다. b가 돈을 냈다. 우리는 나란히 버스 뒷좌석에 앉았다. b가 주머니에서 전화기를 꺼냈다. b는 내가 모르는 사람에게 전화를 걸고 모르는 사람에게 웃었다. 그러면 나는 울었다. 왜냐하면 나는 쉽게 슬퍼졌고 아주 천천히 말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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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요즘은 기억이 잘 안나. 나 그래서 요즘은 무서운 생각이 들어. 나 무서워서 죽을 것 같아. 나 까먹으면 어떡하지 걱정이 돼. 니가 나를 까먹으면 어떡하지? 니가 더 이상 오늘을 기억하지 못하면 어떡하지? 내가 더 이상 오늘을 기억하지 못하면 어떡하지? 너는 이거 다 기억할 수 있어? 지금 이거 다 기억할 수 있어? 거울을 봤는데 내가 안 보이는 거야. 그래서 아 이건 꿈이구나 생각했어. 근데 너무 무서운 거야. 그래서 도망갔어. 도망갔는데 이게 꿈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거야. 하지만 거울에는 여전히 아무것도 없는 거야. 하지만 거울에는 여전히 아무것도 없는 거야. 거울만 있는 거야. 나만 없는 게 아니라 아무것도 없는 거야. 그런데 그럼 그게 거울인가? 내가 벽을 거울로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내가 종이를 거울로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건 어쩌면 텔레비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나는 텔레비전에 외쳤어. 반사. 그러니까 텔레비전이 외쳤어. 반사. 아아 텔레비전은 내 얼굴을 먹고 내 말을 뱉어냈어. 그래서 나는 내 얼굴을 볼 수가 없었어. 나는 말했어. 그러자 텔레비전도 말을 했어. 무서웠어. 내가 울고 있는데 갑자기 니가 나타났어. 그리고 니가 내 거울이 되어주겠다고 했어. 나는 웃었어. 그랬더니 니가 웃었어. 내가 머리를 까딱했어. 니가 머리를 까딱했어. 내가 손뼉을 쳤어. 니가 손뼉을 쳤어. 내가 하하하 웃었어. 니가 하하하 웃었어. 내가 왼발을 들었어. 니가 오른발을 들었어. 나는 무서워졌어. 너는 나는 똑같았어. 나는 내가 넌지 니가 난지 몰랐어. 그건 하나도 재미가 없었어. 텔레비전이 고장났는데 재밌을 리가 없잖아. 내가 말했어. 아니 니가 말했어. 아니 내가 말했어. 아니 니가 말했어. 다시 내가 말했어. 다시 니가 말했어. 그리고 내가 말했어. 그리고 내가 말했어.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나는 꿈에서 깨어났어. 아니 그건 꿈이 아니었어. 나는 단지 본드를 불고 거울 앞에 앉아 있었던 거야. 거울에는 내가 비치고 있었어. 그런데 나 거의 십분 동안 아무것도 몰랐어.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거기가 어딘지도 몰랐어. 내가 몇 살인지도모르고 침대 위에서 빨가벗고 누워서 노래 부르는 남자가 누군지도 몰랐어. 나는 한국말도 몰랐어. 나는 아무것도 몰랐어. 그래서 나는 그냥 거울을 쳐다봤어. 하지만 나는 거울이 뭔지도 몰랐어. 본다는 게 뭔지도 몰랐어. 생각을 하려고 했는데 머리가 너무 아팠어. 아니 생각을 할 줄도 몰랐어. 몸을 움직일 줄도 몰랐어. 나는 내 입이 벌어지는 것을 바라보았어. 그건 너무 신기했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어. 벌어진 입에서 침이 흘러나왔어. 흘러나온 침이 내 턱을 타고 흘러내렸어. 하지만 난 침도 턱도 몰랐어. 그래서 그냥 보기만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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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갑자기 정신이 돌아왔어. 그 순간에 떠오른 것은 나도 아니고 침도 아니고 거울도 아니고 깡패도 아니고 바로 너였어,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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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b가 쉬는 날이었다. 나는 b와 놀기로 했는데 깡패도 보고 싶었다. 그래서 나와 b와 깡패는 다 함께 시립대공원에 가게 되었다. b는 투덜거렸고 깡패는 기가 죽어 있었다. 깡패는 빨간 눈으로 계속해서 코를 풀었고 뭐든지 다섯 번씩 말해야 알아들었다. b는 보라색 나일론 점퍼에 망사스타킹을 신고 있었다. 나는 반스타킹을 신고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나는 신이 났다. b가 낮고 음침한 목소리로 박자도 없이 중얼거렸다. 사막에샘이넘쳐흐르리라사막에꽃이피어향내나리라사자가어린양과뛰놀고어린이도함께뒹구는참사랑과기쁨의그나라가이제속히오리라. 우아 그게 뭐야? 찬송가야. b가 음울하게 대답했다. 내가 손뼉을 쳤다. 우아 요새 교회에선 힙합을 하나보지? 어릴 적에 성가대를 했는데 쏘프라노를 안 시켜주는 거야. b가 말했다. 그때부터 교회에 안 나갔어. b가 음울하게 고개를 숙였다. 버스가 멈춰섰다. 거기엔 아무도 없었다. 우리는 천천히 텅 빈 왕복 십육차선 도로를 가로질렀다. 깡패가 담배에 불을 붙였다. b의 보라색 나일론 점퍼가 센 바람에 깃발처럼 펄럭거렸다. 나는 웃었다. 깡패는 내가 왜 웃는지 몰랐다. b는 알았지만 웃는 대신 찡그렸다. 횡단보도를 건널 때는 비가 내리다가 공원 관리소 앞을 지날 때에는 웅장한 햇살이 비치다가 주차장을 가로지를 때는 다시 온 세상이 회색이 되었다. 바람은 계속 세게 불었다. b가 코를 풀었다. 우리는 호수를 봐야해. b가 말했다. 뭐라고요? 깡패가 물었다. 뭐라고요? b는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호수가 가까워 올수록 바람은 점점 더 심해졌다. 나는 b의 점퍼가 찢어질 거라고 확신했다. 깡패의 빨간 눈이 굴러떨어질 것 같았다. 너무 추워서 온 얼굴이 갈기갈기 찢어져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너무 추워서. 깡패가 코를 훌쩍였다. 미쳐버릴 것 같아.그래, 나는 미쳐서 너를 호수에 빠뜨려 죽여버릴 거야. b가 말했다. 그것은 진심이었다. 깡패는 아무럿지도 않다는 듯이 어깨를 구겼다가 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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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는 다이아몬드 모양이었고 초록색이었다. 오리가 길게 자란 갈대 사이를 둥둥 떠다녔다. 우리는 허리를 굽히고 그 아름다운 초록색 호수를 내려다보며 고구마를 먹었다. 그리고 됐다. 가자. 우리는 대공원 휴게실로 갔다. 대공원 휴게실에서는 오줌 냄새가 났다. 우리는 손발을 부들부들 떨면서 차가운 김밥을 먹었다. 의자는 냉장고같이 싸늘하고 김밥은 냉장고 맛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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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b는 더욱더 깡패를 미워하고 그래서 깡패는 더욱더 기가 죽었고 나는 어쩔 줄 몰랐다. 너희가 나의 소중한 휴일을 망쳐놓았어. b가 화난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나는 잘못한 게 없었다. 깡패는 계속해서 코를 풀었다. b는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깡패를 쳐다봤다. b는 화를 내며 버스에서 내려 계속해서 화를 내며 한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b가 쏘파에 앉자마자 커다란 검은 파리가 b의 입술에 앉았다. b가 비명을 질렀다. 나와 깡패는 커피를 시켰다. b의 입술에서 쫓겨난 파리는 탁자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느릿느릿 기어다니기도 하고 낮고 느긋하게 빙빙 돌다가 b의 팔뚝에 사뿐히 내려앉기도 했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입을 다물고 각자 쏘파에 늘어져 있었다. 팔뚝에 앉은 파리를 체념한 눈길로 바라보는 b는 힘을 잃은 사자 같았다. 커피가 왔다. 그때 깡패가 놀라운 솜씨로 텅 빈 유리컵 안에다가 파리를 가두는 데 성공했다. 깡패는 약간 수줍게 웃으며 b에게 컵을 건네주었다. b는 굳은 표정으로 컵을 받았다. 고맙다고 말하지 않았다. 깡패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나는 조금 화가 났다. b가 컵에서 파리를 꺼내 한 손에 쥐었다. b의 얼굴에 눈부신 미소가 떠올랐고 이어 손에 든 파리를 깡패의 커피잔 속에 내동댕이쳤다. 그 불쌍한 파리는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 b는 소리내어 웃었다. 깡패가 나에게 말했다. 너는 진짜 대단한 친구를 가지고 있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b가 젖은 파리를 꺼내어 탁자에 내려놓고 날개를 떼어냈다. b는 불쌍한 파리의 엉덩이를 손가락으로 밀면서 자, 어디 다시 기어보시지 자, 어디 다시 날아보시지 하고 말했다. 불쌍한 파리는 바다에 등을 대고 누워 꼼지락거릴 뿐이었다. 나와 b는 똑같이 왼손으로 턱을 괴고 파리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내 눈에는 너희의 얼굴이 흘러내리는 것처럼 보여. 깡패가 말했다. 그러니까 본드 좀 그만 불라고. b가 말했다. 아냐 나 이제 본드 끊었어. 그리고 다른 걸 시작했겠지. b가 고개를 쳐들었다. 너 이제 좀 멀쩡한 사람을 만나. b가 나를 노려보며 그렇게 말했다. 아아 나는 지겨워졌다. b가 깡패가 그리고 오늘이 정말로 정말로 지겨워졌다. 나는 말했다. 나는 우리가 다 똑같이 좆같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하지 마. 내가 어째서 너랑 똑같아? 너는 아무것도 안하잖아. 쟤랑 하루종일 본드만 불잖아. 나는 안 그래. 나는 일을 해. 나는 돈을 벌어. 그래 그렇다. 너는 훌륭하고 나는 거지 같지. 하지만 두고 보자. 결국 다 똑같아질 거야. 결국엔 모두 다 똑같이 좆같아진다. 노력해도 소용없어. 너도 알잖아. 그러니까 너도 노력하지 마. 일도 하지 마. 아무것도 하지 마. 씨발 우리 다같이 본드나 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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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좋다. 나 본드 되게 많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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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는 내 말을 못 알아들은 척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깡패 때문에 내가 이상해졌다고 소리를 질러서 깡패 때문에 내가 이상해졌다고 소리를 질러서 결국 깡패까지 화가 나게 만들었다. 결국 나와b 그리고 깡패는 모두 다 화가 났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구경하기 시장했다. 갑자기 b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옆자리에 가서 담배와 라이터를 빌려 담배에 불을 불인 다음 자리로 돌아와 다시 왼손으로 턱을 괴고 오른손에 든 담배를 불쌍한 파리의 엉덩이에 갖다댔다. 파리가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르게 몸을 떨기 시작했다. 나와 깡패는 입을 반쯤 벌리고 들리지 않는 비명을 들었다. 파리가 타고 있었다. b는 꼼짝도 하지 않고 담배 한 대를 다 태웠다. 파리는 죽었다. b가 마지막으로 탁자에 떨어진 담뱃재를 손으로 문질러서 글씨를 썼다. 맛있게 잘 익었다. 그리고 나갔다.


 


*


 


b가 도착한 곳은 샤넬이었다. 나와 깡패도 그랬다. 그런데 깡패가 자기는 그만 돌아가겠다고 했다. 나는 깡패를 가지 못하게 했다. b가 너한테 사과할 때까지 가면 안돼. 나는 절대 사과 안해. b가 말했다. 안한다잖아 갈래. 안돼 받아내야 돼. 알겠어. 깡패는 매우 어두운 표정을 지은 채 의자에 앉아서 다리를 떨기 시작했다. 사과해. 나는 b에게 말했다. 꺼져 장사해야 돼. b는 바로 그렇게 말했다. 오늘 문 닫는 날이잖아. 꺼져 장사할 거야. 깡패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게의 끝에서 끝까지 걷기 시작했다. 나는 그가 걱정되었지만 모른 척했다. 사과해. 나는 계속해서 말했다. 사과해. 꺼져. 사과해. 꺼져. 사과해. 깡패가 내 손을 잡았다. 그의 눈이 갑자기 유난히 반짝거리고 얼굴이 화사해 보였다. 나 화장실에 좀 갔다 올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깡패가 경쾌하게 뒷문으로 빠져나갔다. 나는 다시 b에게 계속 사과하라고 소리치기 시작했다. 사과해! 그러면 b도 꺼지라고 소리쳤다. 근데 갑자기 b가 멈칫하더니 나를 향해 아주 나쁜 웃음을 지었다. 뭔지 알아? b가 그렇게 물었다. 뭔지 몰라. 내가 대답했다. 여기 있던 본드가 없어졌다. b가 필통을 가리켰다. 아주 크고 쌔거였는데. 아니야 오줌 싸러 간 거야. 오줌도 싸고 본드도 불러 간 거지. 아니야. 나는 의자에 앉아 깡패를 기다렸다.


 


*


 


깡패는 한참 후에 돌아왔다. 꿈속에서, 꿈과 함께, 내가 절대 볼 수 없는 꿈에 둘러싸여서 깡패는 돌아왔다. 깡패와 눈이 마주친 순간 내 심장은 툭 하고 깨져버렸다. 나는 눈을 감았다. 내년에 깡패는 어디에 있을까? 나는 생각했다. 나는 깡패가 내년에는 샤넬의 화장실에서 할아버지와 쎅스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니 깡패가 내년에 할아버지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때가 되어도 내가 여전히 깡패를 사랑하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아니 내년이 되면 나는 분명히 깡패를 미워하고 있을 것이다. 아 이런 생각은 정말 싫다. 하지만 머릿속이 완전히 상한 두부가 되어버린 깡패를 더 이상 사랑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럴 수는 없을 거다. 나는 바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눈을 떴다. 깡패가 보였다. 깡패가 탁자 위로 손을 뻗고 있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깡패가 보였다. 깡패가 탁자 위로 손을 뻗고 있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깡패가 뻗은 손이 손가락 끝부터 나비처럼 파닥거리기 시작했다. 이어 그의 몸 전체가 커다란 검은 나비의 날개가 되어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깡패가 바닥으로 쓰러졌다. 내가 그에게 뛰어갔을 때 그의 입에서는 상한 크림같이 부글거리는 침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코피가 콧물처럼 흘러나왔고 그 피는 붉었지만 힘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이제 깡패는 사람보다는 망가진 컴퓨터와 같아 보였다. 나는 b를 보았다. b는 한 손에 커다란 맥주잔을 한 손에는 걸레를 들고 있었다. 다시 깡패를 봤을 때 깡패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


어떻게 해야 돼? 나도 몰라. b가 말했다. 나는 울기 시작했다. 우리가 죽인 것도 아니잖아. b는 냉정했다. 나는 옷을 벗어 깡패의 머리에 덮어주었다. b가 서랍에서 커다란 비닐봉지를 꺼내 던졌다. 비닐봉지는 죽은 깡패 위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어떻게 하지? 해가 지고 있었다. 경찰에 신고할까. 안돼. 붉은 노을이 가게 안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나는 b를 보았다. 태워버리자. 그렇게 말했다. 태워버리자. b는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b의 손을 잡았다. b가 눈을 한 번 깜빡했고, 약간 우는 것 같았다. 그리고 말했다. 그래. b가 문을 잠그고 셔터를 내렸다. 나는 죽은 깡패를 비닐봉지로 둘둘 쌌다. 우리는 비닐봉지에 싼 죽은 깡패를 술집 뒤 공터 쓰레기장으로 가지고 갔다. 나는 계속 울었고 그러나 열심히 했다.


 


*


 


b가 망을 보는 사이 나는 깡패의 몸에 시너를 부었다. b가 종이에 불을 붙여 깡패에게 던졌다. 우리는 물러섰다. 불길이 치솟았다. 그건 붉고, 회색 연기가 피어오르고, 기분 나쁘게 웃었다. 그리고 쓰레기 냄새가 났다. 우리는 타오르는 깡패를 바라보았다. 그것밖에 할 일이 없었다. 나는 오늘이야말로 정말 재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또 새로운 깡패를 구해서 놀면 되겠지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일은 오늘만큼도 재미가 없겠지 그리고 모레는 내일만큼도 재미가 없을 거고 그렇게 결국 우리는 정말로 재미없는 사람들이 되어버리겠지 하고 생각했다. 나는 b를 보았다. b의 눈에는 불안이 가득했다. 나는 b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b가 약간 망설이더니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b가 손바닥을 쫙 폈고 우리는 그것을 보았다. 하나는 썬샤인이었고 하나는 롤링스톤즈였다. 깡패 주머니에서 훔쳤어. 잘했어. 내가 말했다. 우리는 그것을 나누어먹었다. 내가 롤링스톤즈를 먹고 b가 썬샤인을 먹었다. 그리고 자 이거. b가 내 손에 다 쓴 토끼코크를 쥐여주었다. 깡패의 마지막 본드였다. 깡패를 기억하자. 그러자. 우리는 서로의 손을 잡고 타오르는 깡패를 바라보았다.


*


소방차가 도착했을 때 나와 b는 완전히 꿈속에서, 꿈과 함께, 우리만 볼 수 있는 꿈에 완전히 둘러싸여 있었다. 꿈속에서 불은 보라색이었다. 노란색이었고 빨간색이었고 투명했고 또 검정색이었다. 불은 햇살이었고 락스타였다. 불은 깡패였고 나였고 b였다. 깡패는 기뻐하고 있었다. 우리는 기뻐하는 깡패를 보며 기뻤다. 우리는 모두를 사랑했다. b와 깡패는 친구가 되어 있었다. 모든 게 다 좋았다. 세상은 체리캔디같이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때 소방차가 왔다. 그 불길한 빨간색 자동차가 우리의 꿈에 차가운 오렌지색 호스를 들이댔다. 꿈은 비명을 지르며 물러섰다. 그러나 우리의 손을 꼭 잡은 채였다. 반쯤 타다 만 깡패가 울부짖었다. 나와 b도 울부짖었다. 우리의 아름다운 꿈은 새빨간 악몽이 되어가기 시작했다.


 


*


다음날 우리는 뉴스에 나왔다. 뉴스를 본 사람들이 우리를 미친년들이라고 욕했다. 그러나 그 다음날 또 다른 더 미친 년과 더 미친 놈이 등장해서 우리는 금방 잊혀졌다.


 


*


b는 샤넬을 그만두고 맨하탄에 다니기 시작했다. 맨하탄의 사장님은 제주도 사람이었고 그곳은 공원에서 아주 멀었다. 나는 다시는 공원에 가지 않았다. 나는 계속해서 b를 기다렸다. 우리는 계속해서 같이 놀았다. 그러나 더 이상 재미있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 나는 더 이상 새로운 깡패를 구하지도 못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는 늙어갔다. 계속해서 늙어갔다. 이제 우리는 할머니 할아버지 거지와 미친 사람이 될 차례였다. 우리는 할머니가 될 것이다. 우리는 할머니가 되어 뒷마당에 양귀비를 키우고 공원에 가서 할머니를 꼬실 것이다. 또 우리는 할아버지가 될 것이다. 할아버지가 되어 맨하탄 화장실에서 쎅스를 할 것이다. 또 우리는 거지가 될 것이다. 우리는 거지가 되어 맨홀 뚜껑을 훔칠 것이다. 우리는 미친 사람이 될 것이다. 우리는 박정희에게 절하고 점퍼를 다섯개씩 껴입고 맨발로 하하하 웃으며 비닐봉지를 모을 것이다. 우리 미친 사람 거지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이제 공원으로 갈 것이다. 그곳에서 우리는 말할 것이다. 우리도 한때 재미있었던 적이 있었다. 우리도 한때 날아다니던 때가 있었다. 그렇다. 우리는 진짜 나비였다. 우리가 진짜 나비였을 때 우리는 구름을 먹었고 선인장을 껴안았다. 우리는 너무 아름다웠으므로 사람들은 우리를 미워했다. 우리는 진짜 나비였다. 그러나 아무도 우리의 말을 믿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나비도 아니고 진짜로 웃을 줄도 모르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꽃처럼 시들어버렸다. 사람들은 꽃이 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꽃은 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만약 단 한 명이라도 꽃이 지지 않기를 진심으로 기도했다면 꽃은 영원하고 우리도 진짜 나비가 되었을 것이다. 깡패는 진짜 깡패가 되어 매일 밤 진짜 좋은 마약을 하고 깡패 형의 철물점은 무사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우리는 나비가 되지 못했다. 깡패는 파리처럼 타버렸다. 그게 끝이었다. 아니 끝까지 타지도 못했다. 그게 우리의 끝이었다.


당신 생각을 또 했지 당신이 점점 커졌지 방문을 열 수 없었지 팔꿈치가 문에 걸릴까봐 정수리가 전등에 닿을까봐 창을 열 수 없었지 누군가 알아챌까봐 그 틈에 창밖으로 당신 발가락이라도 빠져 나갈까봐 내 손으로 내 입을 틀어막았지 당신은 자꾸 커졌지 갑갑하게 숨을 쉬기 시작했지 그만 커지라고 소리쳤지만 당신에게는 들리지 않았지 내 손짓도 보이지 않았지


 


  지금 누가 이 생각을 하는 걸까 당신 생각은 절대 않겠다는 내 속의 무엇이 생각을 하게 하는 걸까 왜 날개에 올빼미 눈 모양을 그리고 뭔가 보는 척 어딘가로 날아갈 수 있는 척 하고 있는 걸까 마음은 침봉에 꽂힌 것처럼 옴짝달싹도 못하면서 당신의 코트 빛으로 얼굴은 물들어 버린 채, 이러다가는 모든 게 다 끝장일 거라는 생각 속에 당신을 또 집어넣고 있는 걸까


 


  식물 조각가 스다 요시히로는 스스로에게 물었지 목련나무를 깎아 나팔꽃을 만들었다면 그것은 목련인가 나팔꽃인가 당신을 내 마음으로 만들었다면 그것은 당신일까 나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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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보선, 무화과 꿈

2019. 1. 29. 21:11
무화과가 먹고 싶어
당신이 그때 내게 말했네
때는 한겨울이었는데
밤거리를 헤맨 끝에
나는 말린 무화과를 사왔네
그대는 말했네
호호호, 수고했어
호호호, 말린 무화과도 무화과는 무화과
그대는 말린 무화과를 맛있게 먹었네
나는 말했네
나는 무화과 알레르기
무화과 한입만 씹어도 숨이 가빠져
 
그대는 말했네
호호호, 당신은 정말 바보 같아
그리고 그대는 고이 잠들었네
그대의 늙은 개를 끌어안고
 
나는 가끔 생각하네
그대의 늙은 개는 지금쯤 늙어 죽었을까
나는 가끔 그대 소식을 듣네
그대는 유명인사 장례식에 참석하는 
유명인사가 되었고
그대는 더 아름다워졌다고 하네
 
나는 가끔 궁금해지네
그대는 몇 살까지 아름다울까
그대는 몇 살에 죽을까
 
나는 어젯밤 그대 꿈을 꿨네
우리는 무화과를 나눠 먹었네
그리고 그대는 고이 잠들었네
그대의 늙은 개를 끌어안고 
나는 그대 옆에 누워 숨이 가빠졌네
나는 눈을 감고 눈물을 흘렸네
그리고 결국 나는 죽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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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 어딘가에 산기슭처럼 무너진 집 한 채 있다면 그 옆에 죽은 듯 늙어가는 나무 한 그루 있겠다. 내 몸 어딘가에 벼랑이 있어 나 자꾸만 뛰어내리고 싶어질 때, 밭고랑 같은 손가락을 잘라 어디에 심어둬야 하는지 모를 때, 늙은 나무 그늘에서 잠들고 싶어. 죽을힘을 다해 꽃을 피우는 일은 못된 짓이다. 죽을힘은 오직 죽는 일에만 온전히 쓰여져야 한다. 당신도 모르게 하찮아지자고, 할 수만 있다면 방바닥을 구르는 어제의 머리카락으로, 구석으로만 살금살금 다니면서 먼지처럼 쓸데없어지자고. 한없이 불량해지는 마음도 아이쿠 무거워라 내려놓고, 내 몸 어디든 바람처럼 다녀가시라고, 당신이 나를 절반만 안아주어도 그 절반의 그늘로 나 늙어가면 되는 거라고.

 그러면 나 살 수 있을까?

 내 몸 어딘가에 나 살고 있기나 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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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을 배운 이후로 미안하다는 말보다 죽이고 싶다는 마음이 많았다

 세상 모든 곳이 다 오락이어서
 캐릭터들이 죽는데 플레이어가 동전을 계속 넣었다

 어느 주말 오후 흰 캔버스를 세우고 멍하니 그리워했다 있는 것들만 죽여 저녁을 먹고 다음 날 아침 그 사람을 웃으며 안았다 손끝으로 상대방의 생명선을 끝까지 따라가 본 사람은 죽을 때까지 같이 한다는 비극을 믿었다 우리가 금방 죽을 거라 했다

 어젯밤 꿈에 눈이 부어서 오늘도 젖은 하루를 살았다 창밖엔 숲 이외의 것들만 조용히 번져서
 우리의 기후가 같을까 무서워졌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날 아무 일 없이 골목을 걸었다

 와락 쏟아지다 터뜨려지는 파스텔이다

 어두운 식탁에 앉아 찬 음식을 오래 씹어야만 하는 나이
 무심히 낯선 여름이 굴러가고
 두려웠다 내가 저 햇살 아래 작고 유순한 것을 죽일 거라는 사실을 알아서
 죽여버리고 싶어서

 지옥이 무너지기 시작하자 안녕과 안녕을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바늘 끝 위에 몇 명의 천사가 쓰러질 수 있을까

 ─사랑해, 태어나줘서 고마워

 그때쯤 결심한 것 같다, 세계가 망가지더라도 시를 쓰자 아름답게 살자 남은 인생을 모두 이 천국에게 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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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2

이승희, 여름의 대화

2018. 12. 23. 23:56
  그녀는 가끔 내게로 소풍 온다.
 
  그녀는 그릇을 닦다말고 골목을 건조하게 바라보는 습관이 있다. 접시가 불안하게 매달린 손 끝으로 여름이 왔다. 죽은 잎과 산 잎을 모두 달고 있는 화분이 제 마음이 기우는 쪽으로 넘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말없이 눈만 깊어지는 오후 그녀가 피는 담배 연기처럼 거대한 적란운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종일 선풍기가 방 안을 돌아다녔으며 도시엔 먼지처럼 모래가 흩어졌다. 숨을 곳이 여름밖에 없다면 믿을 수 있겠어? 그러니깐 뭐든 끝이 있지 않겠어요? 종일 라디오를 들었다. 창문 아래로 벽을 지나 온 물의 흔적이 벽지에 죽은 다알리아처럼 피었다. 수시로 나는 나를 만나지 못하고 잃어버리곤 해. 가만히 내 몸을 내려다 볼 때 참 쓸쓸해. 골목 어디쯤을 휘청이며 걸어가는 내 마음을 만나는 저녁. 내가 울지 못하는 이유는 내 몸에 내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 불안하기 때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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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혜은, 장마ㅡ 휴일

2018. 12. 23. 23:52
  밤이 깊으면 비어 있는 벤치가 없어. 나와 너는 걷고 또 걸었지. 밤이 깊어도 쉴 수가 없어. 너는 나에게 헐벗은 꿈을 맡긴 채, 어느 먼 곳에서. 나는 나에게 아이의 헐벗은 숨을 맡긴 채, 또 어느 먼 곳에서. 휴일이 없는 나라에서 우리는 언제 일하고 어떻게 쉴까. 함께 있을 때 우리는 오래된 양주 가게와 빛바랜 양장점을 지나 어느 낯설고도 낯익은 가난한 골목들을 손에 걸고 걷고 또 걸었었는데, 이제 이 모든 건 오래된 휴일처럼.
 
  좋아하는 마음을 한 가닥도 숨기지 못하던 너는, 이제 내게 몸이 담긴 사진을 보내달라고 말하지. 너는 그곳에서 뭇 사내들이 낯익고도 낯선 여자들의 몸을 더듬어 파괴하는 것을 지켜본다고. 너는 사라진 휴일처럼 두렵고 상처 난 영혼을 더듬으며. 하루는 나와 아이의 이름을 손바닥에 소중하게 적었다고 말했지. 나는 모든 소멸하는 것들의 눈 속에 내 이름을 적어 넣었지.
 
  우리의 몸속에는 매일 같이 노란 눈이 노란 독이 쌓이고 하루하루가 매일의 호흡같이 사라지는 것을 느끼며 가녀린 죄책감을 나누고, 서로의 병들어가는 몸에 욕설을 퍼붓고, 괜찮아 우리는. 우리와 상관없이 시간은 흘러. 낮고 어두운 그늘에 마음을 숨기며. 이 장마는 언제 끝이 날까. 우리는 왜 죄를 짓기도 전에 용서하는 법을 먼저 배워야 하는 걸까.
 
  우리는 약속도 하기 전에 지키는 법을 먼저 배우며 시간을 접어 기다림을 끌어왔고, 나는 아무것도 꿈꾸지 않았고. 사랑해. 그것만은 나의 잘못이었지. 너는 휴일이 없다는 것을 믿어 달라 말했지. 미안해. 실패를 고백하는 우리에게선 존재하지 않았던 첫사랑의 냄새가 났고. 저 가파른 골목은 이제 누구의 낭떠러지인 걸까? 먼 곳에 있으면 멀어지는 것들을 바라보기 쉬웠지. 실은 네게 아무것도 미안하지 않아. 긴 장마는 이제 끝났어. 휴일이 있지만 쉴 수 없는 나라에서, 만날 수 없이 흩어진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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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무래도 눈물 한 토막을 전생에 두고 온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펄쩍, 어항 속을 뛰쳐나와 바닥을 팔딱거리는 금붕어에게 눈이 멀 까닭이 없다 화장을 지우는 당신 입안 깊숙이 나는 아직 거짓말이다 스르륵 바지부터 벗어던지는 혓바닥이 너무 뜨겁다
 
달의 속곳이라도 훔쳐 입은 듯 달달해진 그림자 밑으로 손을 집어넣으면 바람이 발라낸 가시나무의 살이 건져지는 밤, 당신의 무릎 사이 깨진 어항 하나로 떠오른 나는 아무래도 눈물에 길을 가로막힌 것 같다
 
내일쯤 눈꺼풀을 잘라내기로 했다 푸드덕 머리를 열고 날아오르는 새들보다 먼저 태양을 필사한 금붕어 배를 갈라야겠다 한 번의 생으론 탕진할 수 없는 눈물의 체온을 식혀야겠다 고백컨대 나는 전생과 사랑에 빠진 것 같다
 
그러니까 내게 눈물이란 까마득히 밑이 보이지 않는 바닥을 솟구치다 딱, 두 눈을 마주친 물고기의 전생이다 섹스를 할 때마다 둥둥 강물을 거슬러 오르다 죽은 연어가 떠오른다 내 몸은 아무래도 영혼을 헛디뎠다
 
사랑해, 라고 속삭이는 당신의 거짓말로 살기엔
가시가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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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2

조혜은, 장마 ㅡ통화

2018. 12. 23. 23:49
여기는 밤이 깊어. 하지만 네가 있는 그곳에서는 밤보다 깊은 외로움이 밤낮으로 너를 베어 먹는다지. 돈으로 여자를 사거나 밤새 술을 마시거나 새로운 나라에서 일을 하게 되면 곧 버리게 될 일 년 만기의 여자 친구를 만드는 남자들에 대해 너는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하지. 외로워, 외로워서 죽겠어.
  아기는 자라고. 너는 휴식은 있지만 휴일이 없는 나라에서. 나는 휴일은 있지만 쉴 수 없는 오늘을 이야기하지.
 
  여기는 비가 내려. 그곳에서는 비처럼 흐르는 땀이 매순간 너를 오염시킨다지. 너는 다른 나라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욕을 퍼붓고, 아버지뻘 되는 그들 중 누군가의 뺨을 때리고, 이제 갓 성년이 된 어린 노동자들이 석면에서 뒹구는 것을 지켜봐야 한다고. 그들이 버는 것보다 열 배도 더 넘는 돈을 받는다고 상심하고 또 상심하지. 돈으로 여자를 사는 사람들을 이야기하고. 외로워, 외로워서 죽겠어. 너 역시 그 나라에서는 외국인 노동자일 뿐. 누구의 모국어도 아닌 외국의 말로 이야기를 나누겠지. 
  아기는 매일 자라고. 너는 그곳의 방식으로 날 협박하고 조롱하고. 나는 너를 모욕하는 현실의 편에서 이야기를 나누지.
 
  여기는 바람이 많이 불어. 그곳에서는 삭막한 사막의 석양을 사진으로 찍을 수도, 도시의 밤을 거닐 수도, 시를 쓰고 책을 읽을 수도 없다지. 너는 낯선 모든 것들에 힘들고 화가 나고. 원망할 사람이 필요하고. 안약도 없이 눈은 짓무르고. 연약한 온기는 갈 방향을 잃고. 외로워, 외로워서 죽겠어. 너는 울고 나를 때리겠다고 말하지. 다시는 보지 않을 사람처럼 내게 욕을 퍼붓고.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너를 감싸며 나를 사랑한다 말하지. 너는 울고. 다른 남자들처럼 욕을 하거나 함부로 아내를 때리지는 않겠다고 맹세하지.
  아기는 점점 예뻐지고. 여기 사람들은 그래, 남편이 무엇을 했건 아니라고 말하면 믿는 짐승이 아내라고. 지금 너는 같은 목소리를 내고 있을까. 내가 사랑한다고 답해도 너의 꿈은 돌아오지 않을 방향으로 마음을 틀겠지.
 
  여기는 계속되는 장마야. 나는 이곳에서 아내라는 기구처럼 작동하고 타이머가 끝날 때까지 먼지를 털며 널 기다리지. 하지만 네가 사랑한다던 나는 먼지처럼 통화음 속으로 사라져버리고. 부자가 될 손금을 가졌다는 아기는 손금 가득 먼지를 끼고 잠이 들었지.
  아기는 잠을 자고. 너는 오늘도 어느 먼 미래의 행성을 오가며 내게 울면서 전화를 하지. 보고 싶어. 보고 싶어 죽겠어. 네가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너는 누구에게 이야기를 하는 걸까. 우리는 내가 아님에도 나의 모습을 가진 네가 미치도록 보고 싶었고, 서로가 모르는 공간에서 모르는 채로 죽어버리길 간절히 기원했다. 나는 장맛비 속에 유실된 나의 이야기를 찾아, 긴 잠에 든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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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2

나희덕, 다시, 다시는

2018. 12. 16. 14:50
문을 뜯고 네가 살던 집에 들어갔다
문을 열어줄 네가 없기에
 
네 삶의 비밀번호는 무엇이었을까
더 이상 세상에 세 들어 살지 않는 너는 대답이 없고
열쇠공의 손을 빌려 너의 집에 들어갔다
 
금방이라도 걸어 나갈 것 같은 신발들
식탁 위에 흩어져 있는 접시들
건조대 위에 널려 있는 빨래들
화분 속에 말라버린 화초들
책상 위에 놓인 책과 노트들
 
다시 더러워질 수도 깨끗해질 수도 없는,
무릎 꿇고 있는 물건들
 
다시, 너를 앉힐 수 없는 의자
다시, 너를 눕힐 수 없는 침대
다시, 너를 덮을 수 없는 담요
다시, 너를 비출 수 없는 거울
다시, 너를 가둘 수 없는 열쇠
다시, 우체통에 던져질 수 없는, 쓰다 만 편지
 
다시, 다시는, 이 말만이 무력하게 허공을 맴돌았다
 
무엇보다도 네가 없는 이 일요일은
다시,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저 말라버린 화초가 다시, 꽃을 피운다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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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2

이승희, 먼 집의 불빛

2018. 12. 16. 00:09
아기의 첫 걸음마처럼
  꼭 그렇게
  켜지던 먼 집의 불빛들이
  어느 새
 
  모닥불처럼 붙어서 탐스럽게 피고 있더군요. 골목길 속으로 들어갈수록 이 불길도 확확 타올라 골목마다 앵두알처럼 열리기도 하고, 채송화 씨앗처럼 날리기도 했지요. 불빛에 붉게 젖은 저 손바닥만 한 창 너머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따뜻한 밥 한 그릇과 낮은 처마 아래로 모여든 반쯤 몸을 내민 불빛들이 어둠에 대고 치는 발장난 같은 이 어둠은 그래서 따뜻합니다. 불빛 속에 손을 넣어보았나요? 이 간지러운 물기 만져지는 속을 걸어보았는지요. 그림자조차 먼지처럼 가벼운 그 어둠을 사랑해보았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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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2

이 순간, 김소연

2018. 8. 15. 20:29

나는 주머니 속에서 불거져 나온 주먹처럼 

너는 주먹 안에 쥐어진 말 한마디처럼

나는 꼭 쥔 주먹 안에 고이는 식은 땀처럼

너는 땀띠처럼


 


너는 높은 찬장 속 먼지 커다란 대접처럼

나는 담겨져 찰방대는 한 그릇 국물처럼


 


너는 주둥이를 따고 몸을 마음에게 기울인다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따라지기를

나는 기울였다 세워진 술병처럼 반은 비어 있다

마개처럼 테이블 아래로 떨어져 몇 바퀴를 돌다 멈춘다


 


나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너는 벽을 껴안고

나는 미안하다며 무릎을 끓고

너는 고맙다며 두 팔을 뻗고


 


나는 미친 척하고

너는 제 정신인 척하고


 


나는 부딪힐 때마다 소리를 지르는 빗방울이 되어

흔적만이 환한 눈송이가 너는 되어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어서 행복한 너와

이미 만났었기 때문에 괜찮다는 나는

심장이 멎을 것 같은 나는

심장이 제대로 뛰기 시작하는 너는


 


이제야 죽고 싶어진다고 말한다

내가 태어나고 싶어지는

이 순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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