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 2

유희경, 조용한 凶

2016. 10. 19. 17:05


답장을 쓰다 베인 손가락에서 피가 방울진다 이리 작은게 숨어 있다니 툭툭 털고 털었던 눈이, 많이 내렸던 지난겨울 당신이, 내게 주었던 한 송이 꽃이 그랬다 모두 버렸지만 버린 것이 그토록 환한 빛으로 기억될 수 있는것인지 가시질 않아 눈을 감으면 눈 속 가득 만발하는 꽃과 쏟아지는 눈 그리고 당신 단단한 다짐이란 어떻게 무너지는지 보고 싶어 잠 못 든 며칠도 있었다 그들에 대해, 나는 아무것도 쓰지 못했다 그러니, 핑계를 찾지 못한 통증은 凶이 될 것이다 답장은 필요 없었다 굳어 있어도, 속으론 흘려보내는 것이 있다 무엇이든






'text 2'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강정, 낮잠, 바람의 묘지  (0) 2016.10.19
이용한, 가지 마  (0) 2016.10.19
김안, 불가촉천민  (0) 2016.10.19
유지소, 해충의 발생  (0) 2016.10.19
허은희, 손바닥을 벗어난 편자  (0) 2016.10.18
text 2

김안, 불가촉천민

2016. 10. 19. 17:02






​나의 울음과 그의 울음은 왜 다를까

나와, 나의 녹색 가족들아,

재앙의 무게에 비해 우리의 날개는 너무 작고 연약하구나

날갯짓할수록 자목련처럼 붉게 곤두박질치는 일

각자의 바마다 누워 있는 각자의 절벽 아래로

저 아래로ㅡ

그 밑에서 얼마만큼 울어야지 우리는 날아오를수 있을까, 떠오를 수 있을까

부재를 잡아먹고 부재의 불안을 잡아먹어도

절벽은 무럭무럭 자라나고

마지막으로 절벽에서 뛰어내린 사람은 우리중 누구일까

그들은

얼마나 많은 이들이 떨어져 내렸는지 알고 있을까

그렇게 묻는 사이,

그리고 곧

방바닥이 우리의 머리 위로 쏟아지고

누구도 떠오르지 못하고




-




​각자가 지키고 있는 각자만의 거룩한 유지有旨들

그 순수들, 순수란 이름의 절대들, 그리고

그 순수의 악마성이 깨우는

진중한 개들, 개새끼들

모든 약속은 깨졌고 이미 환상은 바닥이 났는데

망각의 나무들 사이사이

'우리'라는 환상들, 환상을 향한 믿음들

언제쯤 끝이 날까, 이미 끝났던 것은 아닐까,

어린 시절 <동물의 왕국>에서 보았던 것 같던

죽은 새끼를 입에 물고 있어 말할 수 없는, 울 수도 없는 어떤 사건들;

우리가 우리로부터 버린 말들, 버려야 했던 말들, 버려야 할 말들

마치 천사의 이름들 같구나,

외워지지 않는 혁명사의 연도와 목잘린 이들

우리라는 악령, 악령의 수난사들

이해하고 싶은 만큼의 선과 악들로 구별된

각자의 거룩한 진실들

여전히 나를 길들이는 여죄들이

곧 닥쳐올 우리의 패배를 향하고


당신은 기어이 당신의 말을 살아낼수 없습니다

당신은 말의 불가능함들 가운데 있습니다 거룩한 재앙이 번져나갑니다

참람하게 적나라한 구원이





-




​나의 거짓들보다 추악함보다

채 돌이 안 된 딸의 밭은 기침을 견딜 수 없는 것은 내가 선하기 때문입니까.


수많은 깃발과 고함으로 가득찬 광장에서 더듬더듬

내가 쓴 글을 읽는 것보다

누렇고 끈적거리는 가래를 뱉어내는 것이 더 비통한 것은 내가 이기적이기 때문입니까.

나는 나의 추함을 걸머쥐고선

벚꽃 피는 교정에 뻣뻣하게 앉은 채로

더러운 욕망아, 더러운 욕정아ㅡ

미친 세상아, 부끄러움아ㅡ

다그쳐도

배꼽에선 검은 물 줄줄 쏟아지고

나는 여전히 당신이 없어야 보이는 지옥을 상상하고

거짓으로 고통하고.

훔친 책으로 공부하고 훔친 감정으로 슬퍼하고 훔친 눈동자로 욕망하면

나는 기억이 만드는 미래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차라리 이 봄은 여전히 울고 있는 이들의 가면입니다.

나는 나의 얼굴을 볼 수 있습니까,

당신의 거울은 당신에게 정직합니까,

커다랗고 두터운 손을 내 머리에 얹고선

악마의 유혹으로부터 이 어린양을 구해 달라고 기도하시던 목사님의 뽀족한 턱처럼

서로 다른 구원을 꿈구는 이들처럼









'text 2'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용한, 가지 마  (0) 2016.10.19
유희경, 조용한 凶  (0) 2016.10.19
유지소, 해충의 발생  (0) 2016.10.19
허은희, 손바닥을 벗어난 편자  (0) 2016.10.18
허연, 가시의 시간 2  (0) 2016.10.14
text 2

유지소, 해충의 발생

2016. 10. 19. 16:57



너의 핏방울을 콕콕콕 찍어서 편지를 쓰고 싶었어 너의 연분홍 손톱 밑에 편지를 쓰고 싶었어 그 저녁이 생각나니? 너의 손가락이 한없이 길어지던 그 골목은 생각나? 사랑도 아니고 혁명도 아니고 겨우 말라비틀어진 탱자 하나 때문에 너를 닮은 탱자 하나 때문에 누군가는 피를 흘리고 누군가는 죽을 듯이 비명을 지르던 그 세계 

 

네가 각각 다른 열 개의 손톱을 가졌으니 나는 각각 다른 열 개의 장미꽃을 그릴 수도 있었어 내 피는 얼음처럼 차갑고 너의 피는 드라이아이스처럼 뜨거우니까 나는 너무 심심해서 토할 것 같고 너는 너무 바빠서 토할 것 같으니까 비록 그것이 거짓일지라도 우리는 모두 그런 척해야 하니까 그런 척해야 비로소 사람 같아 보이니까


적어도 한 번 이상 죽어 본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는 농담들 죽은 사람도 살려 낸다는 신비한 약초에 관한 민간요법들 이웃집 보일러 아줌마와 송이버섯 아저씨의 불륜에 관한 확고한 소문들 그런 것은 굳이 우리 역사에 필요 없는 이야기들


너의 손톱 병정들은 매일 새로운 갑옷으로 무장하고 너의 손톱 성벽을 굳세게 지키고 있었어 네 손톱 밑에 살고 있는 너 토성의 고리처럼 너를 떠나면서 너를 떠나지 못하고 있는 너 네가 사랑하는 너 사랑할 수밖에 없는 너


기어코 너에게 편지를 쓰고 싶었어 네가 모르는 너의 얼굴에 대하여 좌절과 분노가 아니라 순수한 순간의 통증으로 찡그린 너의 얼굴에 대하여 그것은 마치 콧등으로 나에게 윙크를 하는 것 같았어 콧등으로 오래전에 잃어버린 네가 너에게로 돌아오는 것 같았어


오늘보다 내일 네가 조금 더 많이 아팠으면

너의 심장에도 각각 다른 백 개의 손톱이 붙어 있었으면

네가 진짜로 죽어 버렸으면







'text 2'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희경, 조용한 凶  (0) 2016.10.19
김안, 불가촉천민  (0) 2016.10.19
허은희, 손바닥을 벗어난 편자  (0) 2016.10.18
허연, 가시의 시간 2  (0) 2016.10.14
유형진, 雲井 6  (0) 2016.10.14




 

 

 스크린 사각 프레임에 밝고 어두운 음영이 깔리고. 보인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 마부의 손바닥에 돋아나는 풀. 손금길 따라 초록을 달리는 한몸, 두 피사체. 윤기 나는 갈기. 치닫는 속도를 버티는 딴딴한 근육. 발자국마다 남겨지는 기름진 빛다발. 알레그로에서 안단테로 잦아드는 컷. 숨을 고르고 몸을 핥는다. 클로즈업 된 조명 속에서 오랜 노부부처럼 깃들어.

 

언제까지 풀만. 어디까지 달리기만. 허락도 없이 고삐를 틀어쥐고 달라붙은 그림자. 순종이 아닌 맹종을 손바닥 안에 가둔 채, 주먹을 꽉 쥔. 숨이 막혀요, 버둥거리는 목소리 못 들은 척. 이제, 질기게 꼬인 이 줄을. 끊어내자. 너무 오랫동안 달려왔어. 겨우 손바닥만 한 곳에서. 겨우.

 

안장을 떼어내니 등에 날개가 돋을 것 같아. 이렇게 가벼웠다니. 목줄을 끊고 나온 건 쓸 만한 짓이었어. 어슬렁거려야지. 채찍도 없잖아. 가능한 느리게 처음 보는 풀만 뜯는다. 배를 채우고 낮잠에 들던 몸이 갑자기 들썩인다. 머리와 몸통, 다리가 분리될 듯이. 서로를 비틀어 밀어내는 모양새로. 꾸웩꾸웩 토사물을 쏟는다. 몸속 기관 하나하나를 짓이겨 짜는 듯한 괴음이 크레센도로 울린다. 앵글의 초점이 비틀거린다. 몸이 날뛰기 시작한다. 공중으로 솟았다 바닥에 튕겨져 구른다.

 

조명이 손바닥을 다시 비출 때. 고개 돌려, 목에 새겨진 끈 흔적을 감추며. 피고름 흐르는 발바닥을 프레임 밖으로 숨긴다.








'text 2'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안, 불가촉천민  (0) 2016.10.19
유지소, 해충의 발생  (0) 2016.10.19
허연, 가시의 시간 2  (0) 2016.10.14
유형진, 雲井 6  (0) 2016.10.14
강성은, 외계로부터의 답신  (0) 2016.10.14
text 2

허연, 가시의 시간 2

2016. 10. 14. 16:22




  알약 한 알이 녹는 시간 동안 기억이 훈제가 되는 동안 증언은 계속됐다. 블록을 씌운 문자 몇 개가 깜박이면서 나를 재촉했고 나는 가끔씩 눈물을 흘리는 습성과 숨을 몰아쉬는 습성을 털어놓아야 했다. 검은 점 몇 개로 내 이름을 만들어야 했다


  잠 속에서 셀 수 없이 많은 가시가 돋아나는 것에 대해서도 말해야 했다. 누구도 오지 못하고 누구에게도 가지 못하는 그 가시의 시간에 대해서도 말해야 했다. 가시의 시간은 길었으며 아무것도 보듬지 못했다고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나는 방의 주인이 내민, 이제는 단종된 푸른 줄이 그어진 노트에 이름을 쓰고 일어났다 쓴맛을 다 본 소년처럼


  그래도

  결국 가시가 나를 지탱하고 있다고......

  그 말만은 끝내 하지 않았다



 




'text 2'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지소, 해충의 발생  (0) 2016.10.19
허은희, 손바닥을 벗어난 편자  (0) 2016.10.18
유형진, 雲井 6  (0) 2016.10.14
강성은, 외계로부터의 답신  (0) 2016.10.14
이장욱, 이상한 나라  (0) 2016.10.14
text 2

유형진, 雲井 6

2016. 10. 14. 16:20





  너를 사랑해서 아프다고 소리쳤어. 그 소리는 뻗어나가 천장에서 날카롭게 얼어붙지. 유리처럼. 공중에서 부딪혀 깨지는 소리, 바스라지는 소리, 부서져 흩어지는 소리. 화날 때 왜 사람들이 물건을 집어 던지는 줄 알아? 자신의 분노가 얼마만 한 크기인지, 어떤 모양인지 궁금해서 그래. 그래서 무엇인가 와장창 소리 나고 부서지고 흩어지고 깨지는 것을 목격하면서, 자신의 가슴속에 담겨 있던 화를 눈으로 보는 거야. 거친 호흡을 내쉬며 천천히 바라보는 거야 그렇게 관찰된 객관적 상관물이 된 자신의 화를 하염없이, 하염없이 바라보다 보면 알게 돼. 아, 나의 화는 별거 아니구나. 유리처럼 투명하고, 서리처럼 뾰족하고, 공중에서 깨지고, 흩어지고, 흩어져서 날리고, 날려 사라지는. 급기야 어디로 가 버렸는지 알 수 없는 분노들. 싸움이 잦은 집 세간들을 잘 봐 봐. 그 집 식구들 얼굴처럼 어딘가 어둡게 그림자를 만드는 찌그러진 구석이 있어. 테이프와 순간접착제로 잘 붙였지만 주의 깊은 사람은 금방 알아챌 수 있게 살짝 깨져 있지. 전기압력밥솥의 뚜껑도 일그러져 모양이 반듯하지 않지만 처량하게도 제구실을 하며 매일매일 칙 칙 칙 칙. 압력을 빼며 밥을 짓지. 너를 너무 사랑해서 아프다고, 이렇게 내 안에는 폭발할 게 많은데 참고, 참고, 참고, 참으며 다 끌어 담고. 매일매일을 규칙적으로 칙 칙 칙 칙. 시간 맞춰 빼주지 않으면 스스로 빠질 수 없는 화를 가득 담고. 매일매일 저녁이면 밥 짓는 냄새가 집집마다 흘러나오지. 



 





'text 2' 카테고리의 다른 글

허은희, 손바닥을 벗어난 편자  (0) 2016.10.18
허연, 가시의 시간 2  (0) 2016.10.14
강성은, 외계로부터의 답신  (0) 2016.10.14
이장욱, 이상한 나라  (0) 2016.10.14
이영주, 폭염  (0) 2016.10.14




어떤 날은 한밤중 세탁기에서도 멜로디가 흘러나오지

냉장고에서도 가방 속에서도

심지어 변기에서도

 

어떤 날은 내가 읽은 페이지마다 독이 묻어있고

내 머리털 사이로 예쁜 독버섯이 자라기도 한다

그런데 이상하지 나는 죽지 않고

 

어떤 날은 미치도록 사랑에 빠져든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여자가 되어

그런데 이상하지 나는 병들어 가고

 

어떤 날에는 우주로 쏘아올린 시들이 내 잠 속으로 떨어졌다

 

어쩌면 이것은 외계로부터의 답신

당신들이 보낸 것에 대한 우리들의 입장입니다





'text 2' 카테고리의 다른 글

허연, 가시의 시간 2  (0) 2016.10.14
유형진, 雲井 6  (0) 2016.10.14
이장욱, 이상한 나라  (0) 2016.10.14
이영주, 폭염  (0) 2016.10.14
이응준, 안개  (0) 2016.09.14
text 2

이장욱, 이상한 나라

2016. 10. 14. 16:14



당신에게 아주 오래된 이야기를 해줄게. 아주 오래된 이야기 속의 당신. 하지만 당신 속의 아주 오래된 이야기. 이야기는 힘겨워서 밤눈 내리는 월계동 언덕길은 아득하던 그 이상한 겨울. 겨울의 길섶 어딘가 나는 이 곳에 있고 당신은 그곳에 있으며 그곳과 이곳 사이가 자욱해서 두 그루 전신주로만 위태롭던 산동네. 두 그루 전신주는 아름답고 밤눈은 내리고 녹슨 제 땅에서 제 어둠을 파내려갔으므로 단 한번도 송신할 생애를 갖지 못한 그 오래된 이야기. 


당신에게 아주 오래된 이야기를 해줄게. 이야기는 언제나 끝이어서야 시작하는 이상한 나라. 그 나라의 당신. 하지만 당신 속의 아주 오래된 이야기. 겨울의 길섶 어딘가 나는 이곳에 있고 당신은 그곳에 있으며 그곳과 이곳 사이가 자욱해서 두 그루 전신주 같던 이야기. 다시 두 그루 전신주는 아름답고 밤눈은 내리지만 아, 문득 당신이 없고서야 시작할 수 있는 아주 오래된 이야기. 이야기는 문득 끝이어서야 시작할 수 있는 이상한 나라. 당신에게 이제 아주 오래된 이야기를 해줄게. 정말로





'text 2'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형진, 雲井 6  (0) 2016.10.14
강성은, 외계로부터의 답신  (0) 2016.10.14
이영주, 폭염  (0) 2016.10.14
이응준, 안개  (0) 2016.09.14
이성복, 꽃피는 시절  (0) 2016.09.13
text 2

이영주, 폭염

2016. 10. 14. 16:09



수염이 없으면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는 옛이야기를 노인이 되어서야 들었습니다 아침마다 떨리는 손으로 수염을 깎으면서, 그는 새로운 꿈을 꾸게 되었어요 다시 태어난다면 첫 번째로 기도를 하겠습니다 다시 태어나지 않게 해주십시오 스스로 울 수 있는 순간부터 그는 길에서 울고 있습니다 우리는 울면서 태어나는데, 두 번째 기도를 하려고 합니다 다시는 울지 않게 해주십시오 그는 수염을 깎고 인공눈물을 넣고 두 손을 모아 흐릿한 시야를 가늠해봅니다 어지러운 햇빛이 쏟아지네요 비밀이 있다면, 세 번째 기도를 할 수 있을까요 매일 매일 골목길의 잎들을 쓸어내고 건물의 유리창을 닦으면서 바깥으로 던져진 시간을 확인합니다 인간이 서서 걷기 시작하면서 손이 자유로워졌다고 합니다 왜 이곳의 꽃은 항상 쓰레기 더미 위에서 피어날까요 목련 나무 아래 놓인 쓰레기를 버리고 생각합니다 슬픈 기도가 두 손에서 흘러나오는 이 한낮은 너무 뜨겁다고




'text 2'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강성은, 외계로부터의 답신  (0) 2016.10.14
이장욱, 이상한 나라  (0) 2016.10.14
이응준, 안개  (0) 2016.09.14
이성복, 꽃피는 시절  (0) 2016.09.13
이성복, 편지  (0) 2016.09.02
text 2

이응준, 안개

2016. 9. 14. 07:38


안개는
잊을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마음 약한 사람들의 견해다.
고통은 고통대로 간결한 법칙이 있어서
겪고 나면 대개 말은 사라지고 이상한 색깔만이 남는다.
안개에 연루된 자라고 모욕하지 말라.
나는 안개 속에서 태어났다. 안개는 나의 진술이다.
안개를 벽으로 여긴 적은 없다.
다만 화분이라면 깨어 버리고 싶었고
국가라면 멸망시켜 버리고 싶었을 뿐이다.
너무 많이 사랑했는데도
내게 남은 것은 사람이 아닌 문장밖에는 없다.
그대, 내 젊은 피 속에 흐르던 그 꽃들을 용서하지 않아도 좋다.
다만 나의 죄를 왜곡해서는 안 된다.
사랑하는 것이 많을수록 위험해지는 이 세상에서
나의 간극은 극단이었고
나의 극단은 간극이었으니
결국 안개였다. 나는 안개에서 자라났다.
편견이 사상보다 심오하고
어떤 목숨이든 아무런 계통이 없다는 것과
비극의 설계를 섭렵하게 된 계기도 그 안개 속에 숨어 있었다.
안개가 우리를 죽이고 살린다 해도
안개에 대해 가르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안개에 대해 가르친다는 것은 불행하다.
그리하여 나는 안개의 집을 불태운 그날에
말문이 막히듯 너를 추억한다.
안개를 각성하듯 추억을 각성한다.
병원 긴 복도 야윈 의자에 홀로 앉아 있으면
어둠이 어둠 같지 않았던 그가 나였던 것 같지도 않은 오늘에마저
쉬운 단어들로 암호를 만드는 무자비한 안개여.
여기 이 세계는 고독과 치정이 호황이고
나는 인생이 기적이라고 자부하는 자들이
여전히 무섭다. 그대, 너무 사랑해서 화분이라면 깨어 버리고 싶고
국가라면 멸망시켜 버리고 싶은 그대,
나는 안개 속에서 방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개의 주인은 나였다.





'text 2'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장욱, 이상한 나라  (0) 2016.10.14
이영주, 폭염  (0) 2016.10.14
이성복, 꽃피는 시절  (0) 2016.09.13
이성복, 편지  (0) 2016.09.02
김소연, 명왕성에서 2  (0) 2016.08.24
text 2

이성복, 꽃피는 시절

2016. 9. 13. 20:01


멀리 있어도 나는 당신을 압니다
귀먹고 눈먼 당신은 추운 땅속을 헤매다
누군가의 입가에서 잔잔한 웃음이 되려 하셨지요

부르지 않아도 당신은 옵니다
생각지 않아도, 꿈꾸지 않아도 당신은 옵니다
당신이 올 때면 먼발치 마른 흙더미도 고개를 듭니다

당신은 지금 내 안에 있습니다
당신은 나를 알지 못하고
나를 벗고 싶어 몸부림하지만

내게서 당신이 떠나갈 때면
내 목은 갈라지고 실핏줄 터지고
내 눈, 내 귀, 거덜난 몸뚱이 갈갈이 찢어지고

나는 울고 싶고, 웃고 싶고, 토하고 싶고
벌컥벌컥 물사발 들이키고 싶고 길길이 날뛰며
절편보다 희고 고운 당신을 잎잎이, 뱉아낼 테지만


부서지고 무너지며 당신을 보내는 일 아득합니다
굳은 살가죽에 불 댕길 일 막막합니다
불탄 살가죽 뚫고 다시 태어날 일 꿈 같습니다


지금 당신은 내 안에 있지만
나는 당신을 어떻게 보내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조막만한 손으로 뻣센 내 가슴 쥐어 뜯으며 발 구르는 당신







'text 2'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영주, 폭염  (0) 2016.10.14
이응준, 안개  (0) 2016.09.14
이성복, 편지  (0) 2016.09.02
김소연, 명왕성에서 2  (0) 2016.08.24
김소연, 오키나와, 튀니지, 프랑시스 잠  (0) 2016.08.20
text 2

이성복, 편지

2016. 9. 2. 08:10
1

그 여자에게 편지를 쓴다 매일 쓴다
우체부가 가져가지 않는다 내 동생이 보고
구겨 버린다 이웃 사람이 모르고 밟아 버린다
그래도 매일 편지를 쓴다 길 가다 보면
남의 집 담벼락에 붙어 있다 버드나무 가지
사이에 끼여 있다 아이들이 비행기를 접어
날린다 그래도 매일 편지를 쓴다 우체부가
가져가지 않는다 가져갈 때도 있다 한잔 먹다가
꺼내서 낭독한다 그리운 당신…… 빌어먹을,
오늘 나는 결정적으로 편지를 쓴다

2

안녕
오늘 안으로 나는 기억을 버릴 거요
오늘 안으로 당신을 만나야 해요 왜 그런지
알아요? 내가 뭘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요
나는 선생이 될거요 될 거라고 믿어요 사실, 나는
아무것도 가르칠 게 없소 내가 가르치면 세상이
속아요 창피하오 그리고 건강하지 못하오 결혼할 수 없소
결혼 할 거라고 믿어요

안녕
오늘 안으로
당신을 만나야 해요
편지 전해 줄 방법이 없소
잘 있지 말아요
그리운……



'text 2'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응준, 안개  (0) 2016.09.14
이성복, 꽃피는 시절  (0) 2016.09.13
김소연, 명왕성에서 2  (0) 2016.08.24
김소연, 오키나와, 튀니지, 프랑시스 잠  (0) 2016.08.20
안현미, 다뉴세문경  (0) 2016.08.18





잘 있다는 안부는 춥지 않다는 인사야. 고드름 종유석처럼 플라스틱처럼. (너는 전기난로를 장만하라 말할 테지만.) 덕분에 나는 잘 있어. 이곳은 뺄셈이 발달한 나라. 한낮에도 별 떴던 자리가 보여. 사람이 앉았다 떠난 방석처럼 빛을 이겨 낸 더 밝은 빛처럼 허옇게 뚫린 자리가 보여. 그때는 별의 모서리를 함부로 지나던 새의 날갯죽지가 베이지. 하루하루 그걸 바라보고 있어.

말해 줄게. 나의 진짜 안부를. 네가 준 온도계는 미안하게도 쓸모가 없었다는 것도. 네가 준 야광별자리판은 쓸모를 다한다는 것도, 밤낮 칠흑이라 밤낮 빛을 낸다는 것도. (너는 다행이라고 말할 테지만.) 새들은 고드름 종유석 구멍에다 둥지를 틀지. 강아지는 플라스틱으로 배를 채우지. 나는 날마다 뺄셈을 배우지. 나는 점으로 접혔다가 한낮에만 잠시 부풀어 오르는 작은 구슬이 되었어. 생각지 못했던 사물들과 하루하루 친밀해지는 시간들이야.



명왕성은 1930년에 발견될 당시부터 행성인지에 대한 논란이 많았다. 우선 그 크기가 달보다도 작았다. 다른 행성들과는 달리 많이 찌그러진 타원 궤도를 돌고 있었고 더구나 궤도 경사각도 컸다. 가끔씩 해왕성 궤도를 침범해서 아홉 번째가 아닌 여덟 번째 행성 노릇을 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1979년부터 1999년까지 그랬다. 그렇게 늘 외톨이였다. 2006년 여름 명왕성은 행성의 지위를 박탈당하게 되었다. 하지만 왜소행성으로 새롭게 분류되면서 세레스, 에리스 같은 비슷한 특성을 지닌 동료들을 만났다. 천문학자들은 관측기기의 발달로 앞으로는 카이퍼벨트에서 명왕성과 닮은 왜소행성들이 수도 없이 발견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명왕성은 더 이상 외톨이가 아니다. 그래도 추운 건 여전히 변함이 없겠지만.



내 별자리는 천칭좌지만, 올해에는 명왕성좌로 살기로 했다. 명왕성에 대해 내가 아는 건 태양계에서 제외된 별이라는 것과 태양으로부터 아주 먼 별이라는 것뿐. 그래도 올해에는 명왕성좌로 살기로 했다. 그래서 올해에는 명왕성좌 대표로서, 내 별자리의 신화도 만들고 상징과 이야기도 손수 만들어 가기로 했다. 내가 명명하건대, 명왕성좌는 이별한 자들을 위한 망명지다. 어쩐지 명왕성과 잘 어울린다. 나야말로 이별과 잘 어울리는 사람이다. 연애한다고 믿는 모든 국면과 사랑한다고 믿는 모든 사물과 친밀하다고 믿는 모든 타인과 그러해야 한다고 믿는 모든 사상의 뒷모습을 참으로 열심히 바라보는 사람이니까. 그 뒷모습에는 언제나 이별의 기미가 있고, 나는 그걸 알아채기 위해 태어난 사람인 듯하다. 이별이라는 것은 이 별에서 살아남기 위해 우리가 가장 혹독하게 배우는 전술이자, 이 별에서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자들을 위한 유일무이한 신앙 같다.


'text 2'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성복, 꽃피는 시절  (0) 2016.09.13
이성복, 편지  (0) 2016.09.02
김소연, 오키나와, 튀니지, 프랑시스 잠  (0) 2016.08.20
안현미, 다뉴세문경  (0) 2016.08.18
이현호, 금수의 왕  (0) 2016.08.16


 우리가 갈 수 있는 끝이
 여기까지인 게 시시해
 소라게처럼 소라게처럼

 우리는 각자
 경치 좋은 곳에 홀로 서 있는 전망대처럼
 높고 외롭지만
 그게 다지

 우리는 걸었지 돌아보니 발자국은 없었지
 기었던 걸까 소라게처럼 소라게
 처럼

                               +

 신중해지지 않을게
 다만 꽃처럼 향기로써 이의 제기를 할게
 이것을 절규나 침묵으로 해석하는 건
 독재자의 업무로 남겨둘게

 너는, 네가 아니라는 이 아득한 활주로, 나는 달리
고 너는 받치고 나는 날아오르고 너는 손뼉을 쳐줘
우리는 멀어지겠지만 우리는 한곳에서 만나지 그때마
다 우리가 만났던 그 장소들에서, 어깨를 겯는 척하
며 어깨를 기댔던 그곳에서

 "좋은 위로는 어여쁜 사랑이니, 오래된 급류가의
어린 딸기처럼"*

                              +

 소라게 한 마리가 집을 버리는 걸 우리는 본 적이
있지 팔 한쪽 다리 한쪽을 버려가며 걷는 걸 본 적이
있지 그때 재스민 한 송이가 떨어지는 걸 본 적이 있
지 소라게가 재스민 꽃잎을 배낭처럼 업고서 다시,
걸어가는 걸 우리는 본 적이 있지

 우리가 우리를 은닉할 곳이
 여기뿐인 게 시시해
 소라게처럼 소라게처럼
                 
                             +

 나의 발뒤꿈치가 피를 흘리거든
 절벽에 핀 딸기 한 송이라 말해주렴

 너의 머리칼에서
 피냄새가 나거든
 재스민 향기가 난다고 말해줄게






'text 2'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성복, 편지  (0) 2016.09.02
김소연, 명왕성에서 2  (0) 2016.08.24
안현미, 다뉴세문경  (0) 2016.08.18
이현호, 금수의 왕  (0) 2016.08.16
김경미, 다정이 병인 양  (0) 2016.07.17
text 2

안현미, 다뉴세문경

2016. 8. 18. 20:25


언젠가 나는 거울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그게 오늘밤이 될지는 몰랐지만 말입니다 거울 밖엔 장미가 한창입니다 어디선가 몰려온 구름처럼 무거운 음악이 흐르는 이 곳을 빠져나가면 앞도 뒤도 옆도 돌아보지 않는 사랑을 시작할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에 빠지고 싶다는 생각 하나만으로도 사랑에 빠져버릴 수 있었던 초능력을 상실한 지 너무 오래 다시 장미는 피는데 나는 죽은 사람인 것만 같습니다 자명종이 울리는 밤입니다 다른 세상이 열릴 것만 같은 밤입니다
 
   언젠가 나는 거울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물냉면을 먹고 낙산 성곽 길을 내려오던 밤, 당신이 내게 건넨 다뉴세문경을 닮은 거울에 대하여, 그 거울에 새겨진 기하학적인 무늬에 대하여, 오랜 세월 땅 속에 묻혀있던 그 거울에 비쳤을 오래된 어둠에 대하여, 오래된 두려움에 대하여, 그 거울에 새겨진 삼각형문이 주술에서는 재생을 의미한다고 말해주던 당신의 옆얼굴에 대하여, 다시 자명종이 울리는 밤입니다 다른 세상으로 가는 거울 속입니다





'text 2'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소연, 명왕성에서 2  (0) 2016.08.24
김소연, 오키나와, 튀니지, 프랑시스 잠  (0) 2016.08.20
이현호, 금수의 왕  (0) 2016.08.16
김경미, 다정이 병인 양  (0) 2016.07.17
김경주, 비정성시  (0) 2016.06.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