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형 나는 형을 생각하고 있어요 형은 지금 빈 잔을 매만지고 있겠죠 누군가 그 잔을 채워줄 때까지는 형을 생각할 작정입니다
이곳은 쓸쓸합니다 나를 알아보는 이가 없기 때문이죠 사실 혼자 있고 싶었어요 발바닥을 밟고 걸어가는 것처럼 문득 돌아보아도 여전히 나는 있는 것처럼 이곳에도 들판은 없어요 우리에겐 언제나 그랬지 형이 있다면 이곳도 조금 나아질 거라고 생각해보는 중입니다 어디서나 마찬가지인가 봅디다 이곳도 봄이고 먼지 같은 것들이 날리고 있어요 그런 게 추억이겠지만, 알다시피 우리에겐 남은 것도 남길 것도 없어요 그건 그저 먼지 같은 것이겠지
내가 이 엽서를 다 쓸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옛날부터 알고 있었죠 당신이 나를 알고 있었던 것처럼 말이에요 K형 그러니 내가 더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어요 그렇게 짧은 시간인데 이렇게, 뒤죽박죽의 시간이 나를 찾아온다고 해도 나는 형을 위해 내 호주머니를 뒤지지 않을 작정입니다 우리는 골몰하는 시간을 그토록 사랑하지 않았나요
이곳이 멀다고 생각할 때, 나는 형을 원망하고 있어요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말이죠 모든 골목에서 형의 눈동자를 볼 수 있어요 그커다란눈동자가공중을박차고날고있소아래에서위에서날리고길가에멈춰있고이따금채고그속도에나는숨을멈출수가없지 당신의 눈동자를 볼 때마다, 괴로운 일이야 당신 따윈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K형 당신은 이미 알고 있어요 그 매끄러운 빈, 잔을 채울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는 걸 그러니 형은 늘 목이 마르겠지 하지만,
깊은 시간을 뛰어다녀도 좋지 그게 아니어도 좋고 우리는 알고 있어도 또 모르고 있어도 괜찮아요 그런 것을 허락이라고 말하는 것이겠지 나는 이곳에서 이 못 써먹을 사연을 감당해보려고 합니다 또 누가 알겠어요 내가 형을 혹은 형이 나를 추억할 수 있을지, 그런 일이 가능하다면 말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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