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토끼를 만났다
거짓말 아니다
너한테만 얘기하는 건데
전에 난 초록 호랑이도 만난 적 있다니까

난 늘 이상하고
신기한 세상을 기다렸어

'초록 토끼를 만났다'고
또박또박 써 본다
내 비밀을 기억해 둬야 하니까
그게 나에게 힘이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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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나에게 눈을 달라 했다

나는 눈을 주었다

겨울이었다

 

당신은 나에게 입을 달라 했다

나는 입을 주었다

당신은 나에게 손을 달라 했다

나는 손을 주었다

겨울이었다

 

북풍이 씩씩한 주먹으로 구름을 잔뜩 뭉쳤고 눈사람들이

아주 많았다

그리고 당신은 당신의 발로 걸어갔다

 

눈이 없어지자

눈물이 안으로 흘러 고였다

입이 없어졌기 때문에 울음이 안으로 잠겼다

나는 아름다운이라는 말도 하지 못한 채

거울을 생각했다

심장은 똑딱똑딱

 

손이 없어진 내가

어떻게 거울을 열까

눈도 보이지 않는 내가

어떻게 거울을 볼까

 

눈이 내리고 있었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하얀 눈은 토닥토닥 세상을 덮고

까만 밤의 지붕들을 덮고

당신의 발등을 덮고

어둠 속에서 혼자 녹았다가 밤새도록 꽝꽝 얼었다

밤새 아주아주 커다란 거울을 만들어주었다

 

나는 내 발로 걸어가 차갑고 비릿한 거울에 볼을 대었다

심장은 똑딱똑딱

 

울고 있는 눈사람들이 아주 많은 계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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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셔츠 윗주머니에
버찌를 가득 넣고
우리는 매일 넘어졌지

높이 던진 푸른 토마토
오후 다섯 시의 공중에서
붉게 익어
흘러내린다 ​

우리는 너무 오래 생각했다
틀린 것을 말하기 위해
열쇠 잃은 흑단상자 속
어둠을 흔든다

우리의 사계절
시큼하게 잘린
네 조각 오렌지

터지는 향기의 파이프 길게 빨며
우리는 매일매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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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여름도 모자벗고 인사를 다 했다
날마다 내가 오늘 본 가장 아름다운
나를 두고 그대라고 부르는 사람을
나 또한 그대라고 부르면서 그대의
그대가 되는 일은 이 세상의 좋은 일이고
여름 한철로부터 결국에 위임장을 받은
그대는 수개월 뉘엿대는 마음 이제 없이
낮곁을 늘려 여러 꽃말을 수소문한다
밤이 오면 흰 비를 데워 가져다준다
그때 나는 보채지 않고 말곁도 없이
연해지는 방법을 하릴없이 배우는데
전에는 스스로 괴롭히며 얻었던 것들이다
조용히 그러모아 그대는 녹지를 조성한다
그런 다음 군데군데 새소리를 마련하고
누구나 쓸 수 있게 해놓지만
가장 작고 촘촘한 새장은 내 몫이라
한여름에 사랑이 주인 노릇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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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동혁, 망루

2023. 5. 16. 22:33



채광창이 깨지고 더 많은 설원이 생겼다 방 안으로 눈이 온다 커다랗게 밤이 온다

​앵무새에게 너를 용서한다 라는 말을 가르쳐야 한다 앵무새가 울타리 밖으로 날아가 언젠간 너를 만나 너를 용서한다 라고 말하면 너는 그 자리에 앉아 나를 생각할까

​이방인 그것은 거푸집 밖에서 나를 기다리던 인사 나는 거푸집 밖으로 나가 너를 찾으며 유목했다 그사이 거푸집에서 이방인들이 태어났다

​그림자는 왜 나보다 더 빨라질까 거푸집을 나온 순간 모든 것이 다 한복판이 됐는데도 나는 왜 자꾸 도망가고 있을까

​조금 더 작았다면 나는 땅속에서 살았을 거야 채광창이 깨지고 더 많은 설원이 생기고 이방인들이 너를 찾는 나를 쫓고 눈이 온다 커다랗게 밤이 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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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륭, 수상한 동물원

2022. 12. 4. 15:31



고양이 속에는 고양이만 있고 코끼리 속에는 코끼리만 있고 호랑이 속에는 호랑이만 있고 개구리 속에는 개구리만 있고 원숭이 속에는 원숭이만 있어 궁둥이가 빨갛고,

내가 아는 동물들은 다 그렇게 속을 알 것 같은데
사람 속에는 사람만 있을까?

아빠 속에는 아빠만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 곰이 살고 엄마 속에는 염소가 살고 우리 선생님 속에는 늑대가 사는지 구렁이가 사는지 모르고, 거울 속의 나는 더 모를 것 같고,

동물원은 우리 집 거울 속에도 있을 것 같은데
내 속에는 하늘하늘 기린이 살까?

거울 속 어딘가에 온갖 동물들이 들락거리는
문이 있을 것 같은데 찾을 수가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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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2

성동혁, 口

2022. 11. 29. 16:46



당신이 날 재앙으로 인정한 날부터 언덕마다 달이 자라났네

슬리퍼는 낙엽을 모방하며 흩어지고 모이고 계절은 용서까지 치달았다

창세기를 여러 번 읽어도 나는 가위에 눌렸다
난간에 심은 바람에 대해 변명하지 못했다
신앙과 종말을 함께 배워 불안하진 않았다

페달을 밟을 때마다 나오는 허밍은 나의 궤도이다
입을 닫아야 들리는 곡선
죄가 유연하고 둥그렇다
달이 찰 때마다 미안한 것들이 생긴다

죄를 앓고 난 뒤 쿨럭쿨럭 보라색으로 자란 바람이
살 나간 우산 안의 그림자를 밀쳐 내고
몸을 디밀며 안녕?

당신이 옆집에 살았으면 좋겠다
종량제 봉투 안에 가득 찬 악몽을 들고 엘리베이터 안에서 눈인사를 할 수 있도록
새벽 기도를 나가지 않고도 자라난 달을 버릴 수 있도록
동글네모스름한 초인종을 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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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운진, 슬픈 환생

2022. 11. 16. 00:57

몽골에서는 기르던 개가 죽으면 꼬리를 자르고 묻어준단다
다음 생에서는 사람으로 태어나라고,

사람으로 태어난 나는 궁금하다
내 꼬리를 잘라 준 주인은 어떤 기도와 함께 나를 묻었을까
가만히 꼬리를 만져본다
나는 꼬리를 잃고 사람의 무엇을 얻었나
거짓말 할 때의 표정 같은 거
개보다 훨씬 길게 슬픔과 싸워야 할 시간 같은 거
개였을 때 나는 이것을 원했을까

사람이 된 나는 궁금하다
지편선 아래로 지는 붉은 태양과
그 자리에 떠오르는 은하수
양 떼를 몰고 초원을 달리던 바람의 속도를 잊고
또 고비사막의 밤을 잊고
그 밤보다 더 외로운 인생을 정말 바랐을까
꼬리가 있던 흔적을 더듬으며

모래언덕에 뒹글고 있을 나의 꼬리를 생각한다
꼬리를 자른 주인의 슬픈 축복으로
나는 적어도 허무를 얻었다
내 개의 꼬리는 어떡할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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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2

이승희, 여름

2022. 8. 30. 03:43



1
그러니까 여름은 당신이 이 세상에 보낸 모든 질문들에 대한 답장. 잠긴 문이 잠긴 채로 저물어가더라도 그건 모두 당신이 쓴 편지들에 대한 답장. 어느 골목에서 멈칫했던 시간들이 얼마 뒤 먼 고장에서 비로 내리게 되는 일 혹은 이제 그만 실까? 우리 참 많이 살았다고 유리창에 대고 고백하는 일도 당신이 오래 전에 쓴 편지들에 대한 답장들

2
세상을 오므려 꽃 한 송이 속에 밀어 넣으려면 오후 3시쯤이 좋을 것 같아요. 그러면 2시부터는 기차를 타려는 사람들이 조금씩 기울어지겠지요. 아뇨, 당신은 그래도 계속 편지를 쓰세요. 3시까지는 아직 멀었거든요. 또 다른 지구는 필요하지 않아요. 그건 여름이라 그래요. 너무 소란스럽지 않게 천천히 점심을 먹고 깊은 잠을 자도록 해봐요

3
거기서 뭐하냐고 물었습니다. 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렇게 잠시 시간이 흐르고, 그래서 좋으냐고 물었습니다. 당신이 좋으면 좋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이 융성해지는 폐허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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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2

강지이, 여름 샐러드

2022. 7. 20. 13:46




저걸로 샐러드를 만들 수 있을까?

대교에서 얼어붙은 바다를 바라보는 꿈을 자주 꾸었다 굳이 시키는 사람이 없는데도 무언가를 기다렸다 얼어붙은 물속엔 초록 잎사귀들이 빠르게 흐르고 있었다 그게 예뻐서 언젠가는 저걸로 샐러드를 해 먹어야지, 그래야만 한다고 늘 생각했다 그렇다면 도끼를 가져올게 저걸 깨뜨려서 너에게 줄게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나는 아니라고 했다 이건 그렇게 해결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결국 도끼를 남기고 떠났고 나는 그 도낏자루들을 분리해 의자도 만들고 대교를 더 튼튼하게 정비했다 의자에 앉아서 얼음 안에서 궤도를 그리며 돌아가는 잎사귀들을 망원경으로 매일매일 바라보았다 나는 이제 바라보는 것만 할래…… 이제 그만 돌아다니고 싶어……



보통 이렇게 되면 국면 전환을 위해

너는 얼어붙은 바다 위를
아주 가벼운 발걸음으로 사뿐히
걸어온다

그리고 얼음 속에 갇힌 잎사귀가 아닌
흐르는 물 속에서 헤엄치는
잎사귀들을 내게 건넨다

이제는 샐러드를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로 끝날 것이나
나에게 너는 사실 영영 없는 것이 당연하고

그게 그렇게 아쉽지 않다

왜냐하면 샐러드는 있잖아, 꿈에서 깨어나
만들어 먹으면 된다

그런데
만일 네가 있다면

네가 너 자신에 대해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날들이 많길

나를 굳이 구하러 오지 않아도 되는 날들이
당연하길

누군가의 당연한 행복을 이상하게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가 있어?

응. 왜냐하면 나는

이미 대교에 불을 지르고
깨어난 지 오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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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동혁, 어항

2022. 6. 24. 15:36

 


1
문 닫은 박물관 앞에 앉아 죽은 새를 간질이며
전신으로 만나 흉상으로 헤어진 것들을 모아본다

 


2
나무를 기울여 놓고 간 바다
신발 끈으로 발을 묶어줄게 넘어지지 않게
나무의 등은 내가 숨어 앙상하게 지워질 수 있는 크기
사원을 떠나 밤을 향해 뛰어도 한 뼘

 


3
별똥별을 하늘로 반납하듯 폭죽이 터진다
기념일을 돌려주듯 홀가분하다
우린 같은 철로를 쓰는 열차처럼 마주친 적 없지만
가끔 길이 흔들릴 때 당신들은 살아 있구나 생각했다

 

 

4
침몰한 배 안에서 마지막 점심을 먹는다
수풀이 자란 땅이 그립다 파충류들이 모이자 나무라고 말하고 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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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2

허수경, 이국의 호텔

2022. 4. 23. 18:09


휘파람, 이 명랑한 악기는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우리 속에 날아온 철새들이 발명했다 이 발명품에는 그닥 복잡한 사용법이 없다 다만 꼭 다문 입술로 꽃을 피우는 무화과나 당신 생의 어떤 시간 앞에서 울었던 누군가를 생각하면 된다

호텔 건너편 발코니에는 빨래가 노을을 흠뻑 머금고 붉은 종잇장처럼 흔들리고 르누아르를 흉내 낸 그림 속에는 소녀가 발레복을 입고 백합처럼 죽어가는데


호텔 앞에는 병이 들고도 꽃을 피우는 장미가 서 있으니 오늘은 조금 우울해도 좋아

장미의 몸에 든 병의 향기가 저녁의 공기를 앓게 하니 오늘은 조금 우울해도 좋아

자연을 과거시제로 노래하고 당신을 미래시제로 잠재우며 이곳까지 왔네 이국의 호텔에 방을 정하고 밤새 꾼 꿈속에서 잃어버린 얼굴을 낯선 침대에 눕힌다 그리고 얼굴 안에 켜지는 가로등을 다시 꺼내보는 저녁 무렵

슬픔이라는 조금은 슬픈 단어는 호텔 방 서랍 안에 든 성경 밑에 숨겨둔다

저녁의 가장 두터운 속살을 주문하는 아코디언 소리가 들리는 골목 토마토를 싣고 가는 자전거는 넘어지고 붉은 노을의 살점으로 만든 칵테일, 딱 한 잔 비우면서 휘파람이라는 명랑한 악기를 사랑하면 이국의 거리는 작은 술잔처럼 둥글어 지면서 아프다

그러니 오늘은 조금 우울해도 좋아 그러니 오늘은 조금 우울해도 좋아, 라는 말을 계속해도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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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2

허수경, 딸기

2022. 4. 8. 01:53



당신이 나에게 왔을 때 그때는 딸기의 계절
딸기들을 훔친 환한 봄빛 속에 든 잠이
익어갈 때 당신은 왔네​

미안해요, 기다린 제 기척이 너무 시끄러웠지요?
제가 너무 살아 있는 척했지요?
이 봄, 핀 꽃이 너무나 오랫동안
당신의 발목을 잡고 있었어요

우리 아주 오래전부터
미끄러운 나비의 날갯짓에 익어가던 딸기처럼 살았지요
아주 영영 익어 버린 봄빛처럼 살았지요

당신이 나에게로 왔을 때
시고도 달콤한 딸기의 계절
바람이 지나다가 붉은 그늘에 앉아 잠시 쉬던 시절

손 좀 내밀어
저 좀 받아 주세요
푸른 잎 사이에서 땅으로 기어가며 익던 열매 같은
시간처럼 받아 주세요

당신이 왔네
가방을 내려놓고 이마에 맺힌 땀을 닦네
저 수건, 태양이 짠 목화의 솜
작은 수건에 딸기물이 들 만한 저녁 하늘처럼
웃으며 당신이 딸기의 수줍은 방으로 들어와
불그레해지네 저 날숨만 한 마음속으로 지던
붉은 발걸음 하나

미안해, 이렇게 오라고 해서요
미안해, 제가 좀 늦었어요
한 소쿠리 가득한 딸기 속에 든
붉은 비운을 뒤적이는 빛의 손가락 같은 간지러움

당신이 오늘 계절,
딸기들은 당신의 품에 얼굴을 묻고
영영 오지 않을 꿈의 입구를 그리워하는 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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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2

김경미, 연희

2022. 4. 8. 01:49


가요, 외로움을 많이 타서요,
사람들이랑 잘 못 놀면 울어요, 그렇지 민호야?
- 11세 소녀가장 연희 인터뷰 중에서


나도 연희야 외로움을 아주 많이 타는데 나는
주로 사람들이랑 잘 웃고 놀다가 운단다 속으로 펑펑
그렇지? (나는 동생이 없으니 뼛속에게 묻는단다)

열한살 때 나는 부모도 형제도 많았는데
어찌나 캄캄했는지 저녁 들판으로 집 나가 혼자 핀
천애고아 달개비 꽃이나 되게 해 주세요
사람들 같은 거 다 제자리 못박힌 나무나 되게 해 주세요
날마다 두 손 모아 빌었더니
달개비도 고아도 아닌 아줌마가 되었단다

사람들이랑 잘 못 놀 때 외로워 운다는 열한살짜리 가장 열한살짜리 엄마야 민호 누나야
조숙히 불행해 날마다
강물에 나가 인간을 일러바치던 열한살의 내가

오늘은 내게도 신발을 주세요 나가서 연희와 놀 흙 묻은 신발을 주세요
안 그러면 울어요 외로움을 내가요
아주 많이 타서요 연희랑 잘 못 놀면 울어요

달개비도 천애고아도 아닌 아줌마가
열한살 너의 봄 때문에 사람들이랑 잘 못 놀아 준 봄들을 돌려세우는 저녁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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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2

유희경, K

2022. 4. 7. 02:30



창가에 서 있던 사람은 K다. 그는 나와 눈이 마주쳤음에도, 물러서거나 시선을 피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창밖에는 바람이 앞에서 뒤로, 쓰러질 것처럼 불고 있었다.

 

쏟아지는 것을 간신히 붙잡고 있었던 나는 백발의 K가 부러웠던 것 같다. 나에게는 그 시간이 아득했기 때문이다. 지난 햇빛이 타오른다. 불 타버린 것은 두 번 다시 나타날 수 없다. 그래서 K의 회색 눈빛을 훔치고 싶어 했다고 치자. 나는 그때를 떠올릴 수 없고, 상상해내는 것도 힘들기 때문이다. 그건 창문 같은 것이고 잘 닦아놓은 하얀 창틀 같은 것이다.

 

그때는 갈색 종이봉투의 질감과 구겨지는 소리. 그 안에서 풍겨 나오던 싸구려 음식의 냄새. 나는 그 종이봉투를 들고. 가는눈을 뜨고. 어둠이 짙어오고, 탄내가 날 것 같은 자정이. 호객꾼들 거리를 뒤덮고 간판들이 가장 환해지는 그때. K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 수 없다. 그게 나를 미치게 만든다.

 

K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이고 그건 내가 K를 생각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반응의 바깥에 서 있는 것. 나를 데려간, 가장 가벼운 무게의, 자리. 그는 수천의 나비가 만들어낸 사람이다. 그러므로 여전히 날개다. 날개들 쌓여 달아오르는 열이다. K가 사라진 자리에 온도만 남아, 타오른다. 그때 불타버린 K는 다시, 그 자리에 설 수 없이. 흔들리는 K는 K가 아닌 바로 그 K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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