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마침 진눈깨비 흩날린다
코트 주머니 속에서는 딱딱한 손이 들어 있다
저 눈발은 내가 모르는 거리를 저벅거리며
여태껏 내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사내들과 건물들 사이를 헤맬 것이다
눈길 위로 사각의 서류 봉투가 떨어진다, 허리를 나는 굽히다 말고
생각한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참 많은 각오를 했었다
내린다 진눈깨비, 놀랄 것 없다, 변덕이 심한 다리여
이런 귀가길은 어떤 소설에선가 읽은 적이 있다
구두 밑창으로 여러 번 불러낸 추억들이 밟히고
어두운 골목길엔 불켜진 빈 트럭이 정거해 있다
취한 사내들이 쓰러진다, 생각난다 진눈깨비 뿌리던 날
하루종일 버스를 탔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낡고 흰 담벼락 근처에 모여 사람들이 눈을 턴다
진눈깨비 쏟아진다, 갑자기 눈물이 흐른다, 나는 불행하다
이런 것은 아니었다, 나의 일생 몫의 경험을 다했다, 진눈깨비
'text 2'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형도, 어느 푸른 저녁 (1) | 2021.10.12 |
---|---|
이제니, 흐른다 (1) | 2021.08.31 |
김박은경, 안녕, 나야 (0) | 2021.07.10 |
조혜은, 웨딩 마치 ─아름다운 삶 (0) | 2021.05.31 |
유희경, 심었다던 작약 (0) | 2021.05.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