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 2

박서영, 달의 왈츠

2021. 1. 11. 02:09

  당신을 사랑할 때 그 불안이 내겐 평화였다. 달빛 알레르기에 걸려 온몸이 아픈 평화였다. 당신과 싸울 때 그 싸움이 내겐 평화였다. 산산조각 나버린 심장. 달은 그 파편 중의 일부다. 오늘밤 달은 나를 만나러 오는 당신의 얼굴 같고. 마음을 열려고 애쓰는 사람 같고. 마음을 닫으려고 애쓰는 당신 같기도 해. 밥을 떠 넣는 당신의 입이 하품하는 것처럼 보인 날에는 키스와 하품의 차이에 대해 생각하였지. 우리는 다른 계절로 이주한 토끼처럼 추웠지만 털가죽을 벗겨 서로의 몸을 덮어주진 않았다. 내가 울면 두 손을 가만히 무릎에 올려놓고 침묵하던 토끼. 

  당신이 화를 낼 때 그 목소리가 내겐 평화였다. 달빛은 꽃의 구덩이 속으로 쏟아진다. 꽃가루는 시간의 구덩이가 밀어 올리는 기억이다. 내 얼굴을 뒤덮고 있는 꽃가루. 그림자여, 조금만 더 멀리 떨어져서 따라와 줄래? 오늘은 달을 안고 빙글빙글 돌고 싶구나. 돌멩이 하나를 안고 춤추고 싶구나. 그림자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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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경, 라일락

2021. 1. 8. 02:35

 

 

라일락

어떡하지,

이 봄을 아리게

살아버리려면?

 

신나게 웃는 거야, 라일락

내 생애의 봄날 다정의 얼굴로

날 속인 모든 바람을 향해

신나게 웃으면서 몰락하는 거야

 

스크랩북 안에 든 오래된 사진이

정말 죽어버리는 것에 대하여

웃어버리는 거야, 라일락,

아주 웃어버리는 거야

 

공중에서는 향기의 나비들이 와서

더운 숨을 내쉬던 시간처럼 웃네

라일락, 웃다가 지네

나의 라일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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귓가에 세 들어 사는 속삭임처럼
비 오는 소리
멀리서의 안부가 도착한다

복숭아 익어가는 계절
희미한 태몽 이야기는
오고 있는 시간 너머로 우리를 데려가고는 했지

밀어낼수록 가까워지는 기억처럼
눈뜰 때마다 매일 태어나는 속삭임
시간이 우리를 놓아주지 않고 있는 걸까
우리가 놓아주지 않고 있는 걸까, 시간을

누군가 복숭아뼈에 대한 회상을 말할 때
우리는 왜 회상보다 망상을 즐겨 했을까

꽃 피다 지다
너는 이제 없는 사람
나는 복숭아 예쁘게 자르는 일 따위를 소일거리 삼아
하루 한 생을 견디고 있구나, 있지 않구나

알고 있니 복숭아의 꽃말은
사랑의 노예 그리고 천하무적
너에게 나에게
우리에게 어울리기도 어울리지 않기도 한 꽃말에
귀가 멀고, 그토록 멀지 않고

이제 너는 없는 사람
기억이 통조림에 들어 있다면 기한이 끝나지 않기를
꼭 기한을 적어야 한다면 만년으로 적어야지
오래된 문장을 안부 삼고 있구나, 있지 않구나 나는

저 비가 그치기 전에
복숭아 기억통조림을 만들자
오래전 잊었음을 증명하기 위해
증명하기 위해 잊지 않았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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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인, 수업 시간

2020. 12. 28. 21:58

 

어제는 미술 시간이었어요. 연필이 나를 반쯤 그리는 동안 나는 서서히 태어났습니다. 여전히 그대로군. 맘에 안 들어. 연필이 툭 떨어졌습니다.

 

구겨진 종이가 몰래 펼쳐지듯 쓰레기통 속에서 입을 벌렸어요. 새 옷을 입듯 사람의 냄새를 훔치고 반만 그려진 눈을 활짝 떴습니다.

 

어제는 달리기를 했어요. 허들을 넘듯 한 아이, 두 아이, 세 아이……를 지나 나는 그 애에게 비로소 도착했습니다. 뒤로 달리는 연습은 그만하자. 안녕, 안녕, 마지막 아이가 희미해진 손을 들어 인사했습니다.

 

어제는 이름 바꾸기 놀이를 했어요. 한 이름과 다른 이름은 어떻게 구분하니? 그 애에게 물었을 때 몰라, 몰라, 몸에 다닥다닥 붙은 이름들을 떨어뜨리며 그 애는 울었어요. 얼굴은 이미 지워진 것만 같았어요.

 

오늘 나는 구겨지다 만 종이였다가 오후 다섯 시의 바람이었다가 지금은 거의 안개의 목소리입니다. 내일은 사람처럼 눈물을 흘릴 수 있을까요? 나는 아직 배울 게 많고 내일은 해가 질 때까지 그림자를 밟으며 꼬리잡기 놀이를 하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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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은, 1년

2020. 11. 9. 16:32




1월엔 뭐든지 잘될 것만 같습니다
총체적 난국은 어제까지였습니다
지난달의 주정은 모두 기화되었습니다

2월엔
여태 출발하지 못한 이유를
추위 탓으로 돌립니다
어느 날엔 문득 초콜릿이 먹고 싶었습니다

3월엔
괜히 가방이 사고 싶습니다
내 이름이 적힌 물건을 늘리고 싶습니다
벚꽃이 되어 내 이름을 날리고 싶습니다
어느 날엔 문득 사탕이 사고 싶었습니다

4월은 생각보다 잔인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한참 전에 이미 죽었기 때문입니다

5월엔 정체성의 혼란이 찾아옵니다
근로자도 아니고
어린이도 아니고
어버이도 아니고
스승도 아닌데다
성년을 맞이하지도 않은 나는,
과연 누구입니까
나는 나의 어떤 면을 축하해줄 수 있습니까

6월은 원래부터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꿈꾸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7월엔 뜨거운 물에 몸을 담가봅니다
그간 못 쓴 사족이
찬물에 용해되었습니다
놀랍게도, 때는 빠지지 않았습니다

8월은 무던히도 무덥습니다
온갖 몹쓸 감정들이
땀으로 액화되었습니다
놀랍게도, 살은 빠지지 않았습니다.

9월엔 마음을 다 잡아보려 하지만,
다 잡아도 마음만은 못 잡겠더군요

10월이 되었습니다
여전히, 책은 읽지 않고 있습니다

11월이 되었습니다
여전히, 사랑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밤만 되면 꾸역꾸역 치밀어오릅니다
어제의 밥이, 그제의 욕심이, 그끄제의 생각이라는 것이

12월엔 한숨만 푹푹 내쉽니다
올해도 작년처럼 추위가 매섭습니다
체력이 떨어졌습니다 몰라보게
주량이 줄어들었습니다 그런데도
잔고가 바닥났습니다
지난 1월의 결심이 까마득합니다
다가올 새 1월은 아마 더 까말 겁니다
다시 1월,
올해는 뭐든지 잘될 것만 같습니다
1년만큼 더 늙은 내가
또 한번 거창한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2월에 있을 다섯 번의 일요일을 생각하면
각하(脚下)는 행복합니다

나는 감히 작년을 승화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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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 묻은 목도리를 어디에 두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날을 떠올리다 흰머리 몇 개 자라났고 숙취는 더 힘겨워졌습니다. 덜컥 봄이 왔고 목련이 피었습니다.
 

그대가 검은 물속에 잠겼는지, 지층으로 걸어 들어갔는지 나는 알지 못합니다. 꿈으로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기억은 어디서든 터를 잡고 살겠지요.
 

아시는지요. 늦은 밤 쓸쓸한 밥상을 차렸을 불빛들이 꺼져갈 때 당신을 저주했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밤 목련이 목숨처럼 떨어져나갈 때 당신을 그리워합니다.
 

목련이 떨어진 만큼 추억은 죽어가겠지요. 내 저주는 이번 봄에도 목련으로 죽어갔습니다. 피냄새가 풍기는 봄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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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지 않지만 사랑했던 날을 기억한다. 희고 차고 어두운 허공을, 희고 차고 어두운 그 무한의 방을. 나는 하나의 음정을 무한히 반복했다. 드물게 분명했던 어느 날. 공원과 의자와 잔디는 얼어붙고 핵심은 내내 침묵하던 어떤 날. 


떨어진 사과를 바라보던 나날들 
사과처럼 둘이 되는 나날들 

무릎을 꿇은 건 실수가 아니었다. 말을 찾을 시간이 필요했을 뿐. 혀를 놀리는 법을 알지 못했다. 웃지 않기 위해, 울지 않기 위해. 과장을 버리기 위해 내가 버린 진심들. 말이 될 수 없는 계단. 그 계단을 지난 적이 있다. 날아오르듯 떨어지고 떨어지는 심정으로 날아올랐다. 한순간의 고요 속에서 솟아오르는 감정들. 기억은 내부가 되고 나는 바깥이 된다.



미안해요.
나는 나의 주름을 드러내며 말한다.
그러니 미안해요. 
사과는 중력을 증명했고 
중력은 시간을 증명했다 

오래된 의자처럼 앉아 있다. 길어지는 문장을 자르며 숲에서 나온 새가 허공을 가른다. 낮고 무거운 눈이 온다. 길고 어두운 눈이 올 것이다. 끝없이 갈라지는 손가락을 따라간다. 그날의 의자와 잔디가 지워진 건 오래전의 일. 사랑했지만 끝내 사랑하지 못했던 날들을 기억한다. 



떨어진 사과를 바라본다
굴러가는 사과를 따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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쏙독새는 보기에도 참으로 흉측하게 생긴 새입니다.

얼굴은 된장을 덕지덕지 바른 것처럼 군데군데가 얼룩덜룩하고, 부리는 납작한 게 귀에까지 째져 있습니다. 게다가 다리는 한심할 정도로 가냘파서 몇 발짝도 걷지 못합니다. 그런 탓에, 다른 새들은 쏙독새의 얼굴을 보기만 해도 짜증내며 고개를 돌리곤 했습니다.

종다리도 그리 예쁜 새는 아니지만 쏙독새보다는 자신이 훨씬 아름답다고 생각하기에, 어스름한 저녁 무렵에 쏙독새를 만나면 참으로 귀찮다는 듯이 뚱한 표정으로 눈을 감으면서 고개를 돌려버립니다. 종다리보다 더 몸집이 작은 수다쟁이 새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쏙독새 앞에서 험담을 늘어놓곤 했습니다.

“흥, 또 나왔구나. 어머, 저 꼴 좀 봐! 정말이지 저 쏙독새는 새들의 수치야!”

“저 부리 좀 봐. 어떻게 새의 부리가 저렇게 클 수가 있어? 아마 개구리의 친척일 거야.”

아아! 만약에 쏙독새가 아니라 매였다면 작은 새들은 기조차 펴지 못하고, 이름을 듣기만 해도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바들바들 떨며 몸을 바싹 웅크린 채 나뭇잎 뒤에 숨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쏙독새는 매처럼 무서운 새의 형제나 친척이 아니라, 오히려 아름다운 물총새나 보석처럼 귀한 벌새의 형제격이었습니다. (일본어로 매는 ‘다카’, 쏙독새는 ‘밤의 매’라는 뜻의 ‘요다카’)

벌새는 꽃 속의 꿀을 먹고, 물총새는 물고기를 먹고, 쏙독새는 날개 달린 작은 곤충을 잡아먹었습니다. 게다가 쏙독새에게는 갈고리처럼 날카로운 발톱도, 창처럼 예리한 부리도 없었기 때문에, 아무리 연약한 새라도 쏙독새를 무서워할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매의 친척이나 형제도 아니면서, 왜 쏙독새에게는 ‘밤의 매’라는 무서운 이름이 붙은 걸까요? 그것은 쏙독새의 날개가 놀라울 만큼 강인해서, 바람을 가르고 하늘 높이 비상할 때는 사나운 매처럼 강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귀를 찢는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왠지 매의 울음소리와 비슷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매는 흉측하게 생긴 쏙독새가 자신과 비슷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화가 나서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쏙독새의 얼굴만 보면 어깨에 힘을 주고 “이름을 다시 지어라! 빨리 이름을 다시 지으라니까!”하고 호통치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둠이 싸목싸목 밀려들 무렵에 매가 쏙독새의 집에 찾아왔습니다.

“이봐, 쏙독새. 안에 있느냐? 아직도 이름을 바꾸지 않았잖아? 보기보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녀석이군. 나와 너의 인격은 하늘과 땅처럼 차이가 난다는 것을 모르느냐? 나는 푸른 하늘을 끝없이 날아다니지만, 너는 구름이 잔뜩 낀 어두컴컴한 날이나 어두운 밤이 아니면 밖으로 나오지 않지 않느냐? 그리고 내 부리와 발톱, 그리고 너의 부리와 발톱을 비교해보거라.”

“매님, 이름을 바꾸는 건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이름은 제 맘대로 붙이는 것이 아니라 신께서 내리시는 것이니까요.”

“뭐야? 내 이름은 신께서 주셨다고 할 수 있지만, 네 이름은 나와 밤에게서 빌린 것에 불과하지 않느냐? 어서 이름을 바꾸거라.”

“매님, 그건 어려운 일입니다.”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럼 내가 좋은 이름을 지어주지. 장돌뱅이라는 이름은 어떠냐? 장돌뱅이 말이다. 어때, 좋은 이름이지? 그런데 이름을 바꾸려면 공표 의식을 치르지 않으면 안된다. 그 의식은 말이지, 목에 장돌뱅이라고 쓴 팻말을 걸고 ‘앞으로 나를 장돌뱅이라고 불러주세요!’라고 소리지르며 모두에게 인사하며 돌아다니는 것이다.”

“그것만은 도저히 할 수가 없습니다.”

“아니, 할 수 있다. 그렇게 해야 한다. 만약에 모레 아침까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 날카로운 발톱이 너를 갈기갈기 찢어서 죽여버릴 게다. 그러니까 곰곰이 생각해보거라. 나는 모레 아침에 먼동이 트자마자, 한 집 한 집 돌아다니며 네 녀석이 다녀갔는지 물어보겠다. 만약에 한 집이라도 들르지 않으면 네 녀석의 목숨은 그날이 마지막인 줄 알거라.”

“그건 너무나 어려운 일입니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지금 당장 죽는 편이 낫습니다. 차라리 지금 죽여주십시오.”

“아니다. 잘 생각해보거라. 장돌뱅이도 그리 나쁜 이름은 아니니까.”

매는 날개를 한껏 펼치고 자신의 둥지로 날아갔습니다.

매가 떠나자, 쏙독새는 지그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습니다.

‘나는 왜 이렇게 모든 새들에게 미움을 받는 걸까? 아마 내 얼굴이 된장을 바른 것처럼 지저분한 데다 입이 찢어졌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나는 한 번도 나쁜 짓을 저지른 적이 없어. 동박새 새끼가 보금자리에서 떨어졌을 때도 내가 데려다줬지. 하지만 어미 동박새는 유괴범에게서 새끼를 되찾는 것처럼 내게 달려들어 새끼를 빼앗아갔어. 그러면서 비참하게도 나를 비웃기까지 했지. 그러더니 이번에는... 아아! 장돌뱅이라는 팻말을 목에 걸고 돌아다니라니, 정말 끔찍한 일이야.’

어둠의 장막이 주위를 감싸자 쏙독새는 둥지에서 날아올랐습니다. 옅은 구름이 심술궂은 빛을 뿌리면서 낮게 드리워져 있습니다. 쏙독새는 구름에 닿을락말락하게 스쳐지나가면서 소리 없이 하늘을 날아다녔습니다.

그런 다음 갑자기 입을 크게 벌리고 날개를 똑바로 펼치더니, 화살처럼 재빠르게 하늘을 가로질렀습니다. 작은 날벌레 몇 마리가 쏙독새의 목으로 들어갔습니다.

몸이 땅에 닿으려는 순간, 쏙독새는 다시 몸을 돌려 하늘 높이 날아올랐습니다. 이제 구름은 잿빛으로 물들었고, 건너편 산에는 새빨간 노을이 불꽃처럼 활활 타올랐습니다.

이렇게 마음껏 하늘을 날아다닐 때면 마치 하늘이 두 개로 나뉘어진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투구풍뎅이 한 마리가 쏙독새의 목으로 들어와서 미친 듯이 발버둥쳤습니다. 쏙독새는 아무 생각없이 투구풍뎅이를 삼켜버렸지만, 왠지 등골이 오싹해졌습니다.

이제 구름은 완전히 시커멓게 변했고, 동쪽 하늘은 시뻘건 불덩어리처럼 붉게 물들어서 무서운 기분이 들 정도였습니다. 쏙독새는 가슴이 막힌 것처럼 답답했지만 다시 동쪽 하늘로 날아올랐습니다.

투구풍뎅이 한 마리가 또다시 쏙독새의 목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목 속을 할퀴는 것처럼 파닥파닥 날개를 퍼덕였습니다. 쏙독새는 투구풍뎅이를 억지로 삼켰지만, 갑자기 가슴이 덜컹 내려앉아서 그만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눈물을 펑펑 쏟으면서 하늘을 빙글빙글 맴돌았습니다.

‘아아, 투구풍뎅이와 이름도 모르는 수많은 날벌레들이 매일 저녁 나 때문에 죽음을 맞는구나! 그리고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나는 내일 모레면 매에게 죽게 될 거야. 그 사실이 나를 이토록 괴롭게 한다. 아아, 괴롭다, 괴롭다. 앞으로는 벌레를 잡아먹지 않고 차라리 굶어죽겠다. 아니, 그러기 전에 매가 나를 갈기갈기 찢어 죽일 거다. 그렇다면 차라리 머나먼 하늘 저쪽으로 가버리자.’

불덩어리처럼 타오르던 붉은 노을은 물처럼 흘러가서 점점 드넓게 퍼지더니, 구름도 새빨갛게 태우는 것 같았습니다.

쏙독새는 그 광경을 쳐다보면서, 동생인 물총새가 있는 곳으로 똑바로 날아갔습니다. 아름다운 물총새는 이제 막 일어나서, 멀리 떨어진 산에서 산불처럼 활활 타오르는 노을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쏙독새가 쏜살같이 날아오자, 물총새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습니다.

“형님, 안녕하세요? 무슨 급한 일이라도 생겼습니까?”

“아니다. 머나먼 곳으로 떠나기 전에 잠시 너를 보러 온 거다.”

“어디로 떠나시려는 겁니까? 벌새도 멀리 떨어져 있는데다, 형님까지 떠나시면 나는 외톨이가 돼버리지 않습니까?”

“하지만 도저히 떠나지 않을 수가 없구나. 오늘은 아무 말도 하지 말거라. 그리고 너도 어쩔 수 없이 잡아야 하는 게 아니라면 함부로 물고기를 잡지 말도록 해라. 그러면 그만 가겠다. 잘 있거라.”

“왜 그러세요? 조금만 더 있다 가세요.”

“아니다. 지금 떠나나 조금 있다 떠나나 마찬가지다. 나중에 벌새에게 안부나 전해주거라. 이제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거다. 안녕!”

쏙독새는 눈물을 뚝뚝 떨구면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짧은 여름밤이라서 그런지, 벌써 동쪽하늘이 훤하게 밝아오고 있었습니다.

새벽안개를 빨아들인 새파란 풀고사리 잎이 차갑게 흔들렸습니다. 쏙독새는 소리 높여 꾸륵꾸륵 울면서 빈틈없이 둥지를 정리하고, 몸에 붙어 있는 날개와 털을 가지런히 정리한 다음에 다시 하늘 높이 날아올랐습니다.

희뿌연 안개가 걷히자, 마침 동쪽에서 해님이 떠올랐습니다. 쏙독새는 눈앞이 아찔할 만큼 눈부신 것을 참고, 재빠른 화살처럼 해님에게 날아갔습니다.

“해님, 해님. 부디 당신이 있는 곳으로 저를 데려가주십시오. 불에 타서 죽어도 상관없습니다. 저처럼 흉측하게 생긴 새라도, 불에 타오를 때에는 희미한 빛을 내뿜겠지요. 부디 저를 데려가주십시오.”

그러나 아무리 날아가도 해님은 가까워지지 않고, 오히려 점점 작아지고 멀어질 뿐이었습니다.

“쏙독새로구나. 그래. 아주 괴롭겠지. 오늘밤 하늘 높이 날아올라서 별에게 부탁해보거라. 너는 낮에 움직이는 새가 아니니까 말이다.”

쏙독새가 인사하려고 고개를 숙인 순간, 갑자기 현기증이 일어 결국 들판에 있는 풀밭에 떨어져버렸습니다. 마치 꿈속에서 날아다니는 것처럼 온몸이 빨간 별과 노란 별 사이를 왔다갔다하거나, 끝없는 바람에 휘날리거나, 매의 날카로운 발톱에 잡혀있는 듯한 느낌에 휩싸였습니다.

갑자기 차가운 게 얼굴에 떨어져서 쏙독새는 눈을 떴습니다. 어린 암억새 이파리에서 이슬이 떨어진 것입니다. 어느새 어둠이 밀려들었는지, 하늘은 희미한 한 조각의 빛도 찾아볼 수 없이 검푸르고, 주위에는 온통 별들이 반짝이고 있습니다.

쏙독새는 하늘 높이 날아올랐습니다. 오늘밤에도 노을은 새빠갛게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쏙독새는 희미한 노을 빛과 차가운 별빛 속에서 하늘 높이, 하늘 높이 날아올랐습니다. 그리고 빙글빙글 맴을 돌더니 드디어 마음을 정했는지, 서쪽 하늘에 있는 아름다운 오리온으로 똑바로 날아갔습니다.

“별님, 서쪽에 있는 검푸른 별님. 부디 당신이 있는 곳으로 저를 데려가주세요. 불에 타서 죽어도 괜찮습니다.”

오리온은 쏙독새의 말이 들리지도 않는 듯이, 계속해서 용맹스러운 노래만 불렀습니다. 쏙독새는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으면서 비틀거리다가 가까스로 멈춰 서서, 다시 한번 날아올라갔습니다. 그리고 남쪽에 있는 큰개자리 쪽으로 똑바로 날아갔습니다.

“별님, 남쪽에 있는 푸른 별님. 부디 저를 당신이 있는 곳으로 데려가주세요. 불에 타서 죽어도 괜찮습니다.”

파랑과 노랑, 보랏빛이 아름답게 어우러진 큰개자리는 계속해서 깜빡이면서 말했습니다.

“바보 같은 소리 말거라. 너는 고작해야 작은 새가 아니냐? 너의 작은 날개로 여기까지 오려면 수억 년, 수조 년, 수억조 년이 걸릴 게다.”

큰개자리가 재빨리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려버리자, 쏙독새는 실망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비틀거리다가 다시 두 번째로 빙글빙글 맴을 돌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결심한 듯이, 북쪽에 있는 큰곰별 쪽으로 똑바로 날아가면서 소리쳤습니다.

“북쪽에 있는 푸른 별님. 부디 저를 당신이 있는 곳으로 데려가 주세요.”

그러자 큰곰별이 타이르듯이 조용하게 말했습니다.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잠시 머리를 식히거라. 그런 생각이 들 때는 빙산이 떠 있는 바다 속으로 뛰어들든지, 근처에 바다가 없다면 얼음이 둥둥 떠 있는 컵에 뛰어들면 정신이 들게다.”

쏙독새는 실망을 이기지 못해 비틀거리다가 다시 하늘에서 빙글빙글 맴돌았습니다. 그리고 지금 막 은하수 건너편에 나타난 독수리자리를 향해 소리를 질렀습니다.

“동쪽에 있는 새하얀 별님. 부디 저를 당신이 있는 곳으로 데려가주세요. 불에 타서 죽어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되돌아온 것은 독수리별의 거만한 목소리였습니다.

“거참, 도대체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 상대를 해주지! 별이 되려면 그에 어울릴 만한 신분이어야 하고, 돈도 엄청나게 많아야 한다.”

그 말에 기운을 잃은 쏙독새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날개를 접고 땅으로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단단한 땅에 연약한 발이 닿으려는 순간, 갑자기 봉홧불이 타오르듯이 맹렬한 기세로 하늘로 날아올랐습니다. 쏙독새는 하늘 한가운데까지 오더니, 독수리가 곰을 습격할 때처럼 몸을 부르르 떨고 털을 거꾸로 곤두세웠습니다. 그리고 까륵까륵 까륵까륵 하고 주위가 떠나가라 소리쳤습니다. 그 울음소리는 매의 울부짖음처럼 날카로웠습니다. 그러자 들판과 숲에 잠들어 있던 새들도 모두 잠에서 깨어나 몸을 바들바들 떨면서, 별이 총총히 박힌 어두운 하늘을 의아한 표정으로 올려다보았습니다.

쏙독새는 하늘을 향해 끝없이 끝없이 똑바로 날아올라갔습니다. 이제 불덩어리 같던 저녁 노을은 담배꽁초처럼 자그맣게 보일 뿐이었습니다. 그래도 쏙독새는 다시 올라가고 또 올라갔습니다.

살을 에는 듯한 추위로, 가슴이 새하얗게 얼어붙었습니다. 공기가 부족했기 때문에, 미친 사람처럼 정신없이 날개를 파닥거리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렇게 올라가고 또 올라가도, 별의 크기는 좀전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내뿜는 숨결은 풀무질을 하듯이 점점 빨라지고, 추위와 서리는 예리한 칼날처럼 온몸을 찔렀습니다. 날개의 신경이 완전히 마비돼버린 쏙독새는, 눈물이 고인 눈을 뜨고는 다시 한번 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이 쏙독새의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이제 쏙독새는 떨어지고 있는지, 올라가고 있는지, 거꾸로 되어 있는지, 위를 향하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습니다. 다만 마음은 더할 수 없이 편안하고, 피가 배어 나온 커다란 부리는 옆으로 비틀어지긴 했지만 분명히 웃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얼마나 지났을까, 쏙독새는 조용히 눈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도깨비불처럼 푸르고 아름다운 빛으로 조용히 타오르고 있는 자신의 몸을 바라보았습니다.

바로 옆에는 카시오페이아자리가 있고, 은하수의 푸른빛은 바로 뒤쪽에 있습니다. 그리고 쏙독새의 별은 계속 불타고 있습니다.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계속 타오르고 있습니다.

지금도 계속 타오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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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신 집에서 잘 수 있나요? 오늘 밤
당신은 말한다 조용한 눈을 늘어뜨리며

당신은 가느다랗고 당신은 비틀려 있다

그럴 수 없다고, 나는 말한다 나도 어쩔 수가 없다고

가만히, 당신은 서 있다 딱딱한 주머니 속으로
찬 손을 깊숙이 묻어둔 채 한동안 오래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을 것이다
행인들에게 자꾸만 치일 것이고
아마도 누구일지 모르는 한 사람이 되돌아오고
따뜻한 커피를 건넸을 것이다
그러는 동안 겨울이 갔던가

2
오늘은 고통과 죽음에 대한 장을 읽고 있다
이 책을 기억하는지
연필로 한 낙서를 지우지 못하고 도서관에 반납한 내게
겨울에, 당신은 묻는다 아무래도
이 책의 삼십칠 페이지에 있는 글씨가 내 글씨 같다고

안녕? 페이지 숫자가 마음에 든다

3
편도를 타고 가서 돌아오지 말자.
옆 테이블에서 젊은이들이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 말들 끝에 찻잔을 비우고 헤어진다
희미한 그림자들로 어떻게
대낮의 거리 한복판을 버티어낼까 망설이며
길 끝으로 사라져가고 있을 것이다

4
어느 거리에선가,
당신은 누구일지 모를 한 사람을 만날 것이다
가느다랗고, 비틀리는 누군가를
그리곤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당신 집에서 잘 수 있나요? 오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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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2

이제니, 분실된 기록

2020. 4. 21. 21:50

첫 문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슬픔을 드러낼 수 있는, 슬픔을 어루만질 수 있는.

고통의 고통 중의 잠든 눈꺼풀 속에서.



꿈속에서 나는 한 권의 책을 손에 쥐고 있었다.

    


펼치자마자 접히는 책

접힌 부분이 전체의 전체의 전체인 책



너는 붉었던 시절이 있었다

너는 검었던 시절이 있었다

검었던 시절 다음엔 희고 불투명한 시절이

희고 불투명한 시절 다음에는 거칠고 각진 시절이

    


우리는 이미 지나왔던 길을 나란히 걸었고. 열린 눈꺼풀 틈으로 오래전 보았던 한 세계를 바라보았다.

    


고양이와 나무와 하늘 속의 고양이

나무와 하늘과 고양이 속의 하늘과

    


산책하기 좋은 날씨였다. 잎들은 눈부시게 흔들리고 아무것도 아닌 채로 희미하게 매달려 있었다.

아름다움이란 이런 것인가. 나는 지금 순간의 안쪽에 있는 것인가.

    


아니요 당신은 지금 슬픔의 안쪽에 있어요.

슬픔의 안에. 슬픔의 안의 안에.

마치 거품처럼.

    


우리는 미끄러졌고 이전보다 조금 유연해졌다.

    


언젠가 내가 썼던 기억나지 않는 책

언젠가 내가 읽었던 기적과도 같은 책

    


지금은 그저 이 고통의 고통에 대해서만 생각하도록 하자. 우주의 밖으로 나갔다고 믿는 자들이

실은 우주 속을 헤매는 미아일 뿐이듯이. 우주의 밖은 여전히 우주일 뿐이니까. 슬픔 안의 슬픔이

슬픔 안의 슬픔일 뿐이듯이.

   


쓴 것을 후회한다. 후회하는 것을 지운다.

지운 것을 후회한다. 후회하는 것을 다시 쓴다.

    


백지와 백치의 해후

후회와 해후의 악무한

    


텅 비어 있는 페이지의 첫 줄을 쓰다듬는다.

슬픔에는 가장자리가 없고 우리에게는 할 말이 없었다.

    


펼쳐서 읽어라

펼쳐서 다시 써라

    


분열된 두 개의 손으로 쓰인 책. 너는 어둠 속에서 다시 나타난다. 극적인 빛을 끌고 나타났다 이내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밤은 길어진다. 손은 어두워진다. 너는 다시 한 발 더 어둠 속으로 나아간다.

    


무수한 괄호들 속의 무수한 목소리들

말과 침묵 사이에 스스로를 유폐한 사람들

    


이름 없는 이름들을 다시 부르면서

다시 돌아온 검은 시절을 바라보면서


    

그것은 고통의 고통 중의 잠든 눈꺼풀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흙으로 다시 돌아가듯이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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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2

정호승, 산산조각

2020. 3. 2. 13:09

룸비니에서 사온
흙으로 만든 부처님이
마룻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팔은 팔대로 다리는 다리대로
목은 목대로 발가락은 발가락대로
산산조각이 나
얼른 허리를 굽히고
서랍 속에 넣어두었던
순간접착제를 꺼내 붙였다
그 때 늘 부서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불쌍한 내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어 주시면서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을 얻을 수 있지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으로 살아갈 수가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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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너는 마지막 길몽이었다 네가 사라진 후 내게 그런 일들이 일어났다 너는 미리 일어나 버린 일


2

번지는 얼굴을 본다


우리가 가꿀 곳은 불이 가닿는 만큼


3

당신은 왜 나의 거실에 함부로 들어오는가

겨울이 시작된 곳으로 여름의 나를 함부로 데려가는가

그곳에서 여전히 죽은 나를 꿈꾸는가


4

도자기는 자주 깨지는 가구다

고정된 가구는 없다


5

어디까지가 불의 웅덩이인지

불이 번지는 눈썹까지인지

나만 황홀했던 잠자리인지

끔찍하게 절뚝거리던 다리까지인지


6

여전히 당신은 아름답다

나는 부끄럽고 슬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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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2

김승희, 장미와 가시

2020. 2. 14. 18:06

눈먼 손으로 나는 삶을 만져 보았네.
그건 가시투성이었어.
가시투성이 삶의 온몸을 만지며
나는 미소지었지.
이토록 가시가 많으니
곧 장미꽃이 피겠구나 하고.

장미꽃이 피어난다 해도
어찌 가시의 고통을 잊을 수 있을까 해도
장미꽃이 피기만 한다면
어찌 가시의 고통을 버리지 못하리오.

눈먼 손으로
삶을 어루만지며
나는 가시투성이를 지나
장미꽃을 기다렸네.

그의 몸에는 많은 가시가
돋아 있었지만, 그러나,
나는 한 송이의 장미꽃도 보지 못하였네.

그러니, 그대, 이제 말해주오,
삶은 가시장미인가 장미가시인가
아니면 장미의 가시인가, 또는
장미와 가시인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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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2

한강, 서시

2019. 10. 23. 01:57


어느 날 운명이 찾아와
나에게 말을 붙이고
내가 네 운명이란다, 그동안
내가 마음에 들었지, 라고 묻는다면
나는 조용히 그를 끌어안고
오래 있을 거야
눈물을 흘리게 될지, 마음이
한없이 고요해져 이제는
아무것도 더 필요하지 않다고 느끼게 될지는
잘 모르겠어

당신, 가끔 당신을 느낀 적이 있었어,
라고 말하게 될까
당신을 느끼지 못할 때에도
당신과 언제나 함께였다는 것을 알겠어,
라고

아니 말은 필요하지 않을 거야
당신은
내가 말하지 않아도
모두 알고 있을 테니까
내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후회했는지
무엇을 돌이키려 헛되이 애쓰고
끝없이 집착했는지
매달리며
눈먼 걸인처럼 어루만지며
때로는 당신을 등지려고 했는지

그러니까
당신이 어느 날 찾아와
마침내 얼굴을 보여줄 때
그 윤곽의 사이 사이,
움푹 파인 눈두덩과 콧날의 능선을 따라
어리고
지워진 그늘과 빛을
오래 바라볼 거야
떨리는 두 손을 얹을 거야
거기,
당신의 뺨에,
얼룩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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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올 때마다 육각형 눈이 와. 나는 여름 들판에서 너를 기다려. 하얀 벌들이 밤하늘을 뒤덮고, 나의 심장에도 차가운 눈이 내려.

너는 새벽에서 이곳으로 와. 빈방에서 여름으로 와. 그럴 때 너는 너보다 커 보이거나 작아 보여. 그림자놀이처럼.

침엽수에게 어떤 모양의 잎을 달고 싶으냐고 물으면 흰 왕관처럼 얹힌 눈이 녹아버릴까.

북쪽 여왕의 반대말은 북쪽 왕인가 남쪽 여왕인가 남쪽 허름한 소녀인가 소년인가. 이런 걸 궁금해하면 네가 화를 낼까.

담요를 드릴까요. 물어보면 네가 조금씩 녹을까. 녹으면서 허둥댈까.

너는 하얀 자동차를 타고 한 방향으로 가. 추위를 느끼지 못하는 나라로. 눈보라가 치고 침엽수가 자라는 빈방 속의 반방으로.

나는 옆구리나 심장으로 태어났으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할 때가 많아. 너의 안을 오래 들여다보지 못하고. 뜨거움이 모자랄 때마다 나는, 발바닥인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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