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 2

이현호, 금수의 왕

2016. 8. 16. 13:04
금수만도 못한 인간이란 말 들어봤다면
 
그렇게 말한 건 자기 배로 날 낳은 한 암컷이었지 내 하나뿐인 언청이 친구만 평생 욕하다 내장까지 썩어버렸지만
그년이야말로 태어나서 가장 잘못 사귄 사람
 
발 달린 것들 모두 한 마리 미친개를 피해 다닌 사건들의 시간
달아나기 전에 저게 왜 미쳤는지 궁금해 하지 않는 걸까
 
날카로운 것들이 정점을 가진 것들이 눈부셔
 
세상이 끝날 것처럼 끝난 것처럼
나는 길거리를 날뛰었고 그런 날만큼은
우연의 자식이 아니었지
 
그러다 이야기가 되려니 개 같은 사랑이…
불안을 먹이고 불안은 사랑을 먹이며
 
다음엔 안개로 태어나고 싶다는
널 보는 동안만이 이 지상의 삶에서 손 뗄 수 있었지
너 없이도 세상이 계속된다고 믿는 것들에겐 함부로 칼을 꽂았고
 
다음엔 불빛으로 태어나고 싶다는
술집 창가에 비친 널 똑바로 볼 수 없어 나는 눈을 도려내고 말았지
그토록 아름다운 것 앞에서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나요
 
희열에 찬 살인자의 얼굴이 아니고는
 
단지 마음이라는 죄를 안고 태어나
그 속에 너무 많은 것들을 가두었네
귀뚜라미 붉은 달 끈 떨어진 운동화 훔친 사진기 부러진 칼날 추락하는 고양이 네 머리카락…
나의 배심원들
 
일평생 누굴 도운 일 없는 인간이지만 그래도 단 한 번 거미줄에 걸린 나비를 풀어준 적 있다 해도
 
금수 같은 놈이라는 말 들어봤다면
 
필연을 완성한 금수의 왕은 불에 달궈진 쇠 구두를 신은 듯 춤추었네
순수한 죄의 숲을 가로지르며
먹이에게 달음박질하는 그 맹목의 식욕으로

매일 기차를 탑니다. 거짓말입니다. 한 주일에 한 번씩 탑니다. 그것도 거짓말입니다. 실은 한 달에 한 번쯤 탑니다. 

그것은 사실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날마다 사실을 바라는 건 배신을 믿기 때문입니다. 

꽉 찬 배신은 꽃잎 겹겹이 들어찬 장미꽃처럼 너무 진하고 깊어 잎잎이 흩어놓아도 아름다울 뿐 다른 방도가 없다 합니다. 



산수유가 빨갛게 동백꽃을 떨어뜨립니다. 흰 목련이 거짓말을 하더니 샛노란 은행나무가 됐습니다. 정말입니다. 

사람 안에는 사람이라는 다민족, 사람이라는 잡목숲이 살아 국경선을 다투다 갈라서기도 하고 껴안다, 부러져 못 일어나기도 합니다.

꽃필 때 떨어질 때 서로 못 알아보기도 합니다. 



당신은 세상 몰래 죽도록 다정하겠다, 매일 맹세하죠. 거짓말이죠. 세상 몰래가 아니라 세상 뭐라든이 맞죠. 아시죠. 이것도 거짓말. 

사실은 매일이 아니고 매시간이죠. 매시간마다 거짓말을 하는 건 진실이 너무 가엾어서죠. 

나사처럼 빙글대는 거짓말은 세상과 나를 당신을 더욱 바짝 조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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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주, 비정성시

2016. 6. 5. 14:08
비정성시(非情聖市)
-그대들과 나란한 무덤일 수 없으므로 여기 내 죽음의 규범을 기록해둔다

비 내리는 길 위에서 여자를 휘파람으로 불러본 적이 있는가

사람은 아무리 멋진 휘파람으로도 오지 않는 양이다 어머니를 휘파람으로 불러서는 안 된다 대대장을 휘파람으로 불러서는 안 된다 간호사를 휘파람으로 불러 세워선 안 된다 이것들을 나는 경험을 통해 배웠다 이것이 내가 여기에 들어온 경위다 외롭다고 느끼는 것은 자신이 아무도 모르게 천천히 음악이 되고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외로운 사람들은 휘파람을 잘 분다 해가 뜨면 책을 덮고 나무가 우거진 정원의 구석으로 가서 나는 암소처럼 천천히 생각의 풀을 뜯을 것이다

나는 유배되어 있다 기억으로부터 혹은 먼 미래로부터.

그러나 사람에게 유배되면 쉽게 병든다 그리고 참 아프게 죽는다는 것을 안다 나는 여기서 참으로 아프게 죽을 것이다 흉노나 스키타인이거나 마자르이거나 돌궐이거나 위구르거나 몽골이거나 투르크족처럼 그들은 모두 유목의 가문이었다 그들의 삶은 늘 유배였고 그들의 교양은 갈 데까지 가보는 것이었으며 그들의 상식은 죽어가는 가축의 쓸쓸한 눈빛을 기억할 줄 아는 것이었다 그들은 새벽에 많이 태어났고 새벽에 많이 죽었다

나는 전생에 사람이 아니라 음악이었다 그리고 지금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음악은 그때 나를 작곡한 그 남자다 그는 현세에 음악으로 환생한 것이다 까닭에 나는 그 음악을 들을 때마다 전생을 거듭 살고 있는 것이며 나의 현생은 전생과 같다 나는 다시 서서히 음악이 되어가는 것이다 나는 이 이야기를 간직한다

예감 또한 음악이다 자신이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그러나 자신과 가장 닿아 있는, 자아의 연금술이다 나는 지금 방금 내 곁을 흘러간 하나의 시간을 예감한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내 생각은 음악이 되고 한 컵의 물이라는 음악을 마시는 동안 내 생각은 어느 먼 초원 스페인 양떼들의 털을 스친다

모든 나를 인정하는 순간이 올까? 목이 마르다고. 당신과 함께 사는 동안 여덟 번 말했다

비 오는 날 태어난 하루살이는 세상이 온통 비만 온 줄 알고 죽어간다
비 오는 날 태어나자마자 하수구에 던져진 태아는 세상은 태어나자마자
하수구 속에서 죽어가는 곳이구나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인간의 일이다 그의 어미는 야산의 둔덕에서 하늘을 보며 빗물로 피 묻은 자궁을 씻고 있다 해가 뜨고 개미들이 어미와 태아의 끈이었던 태를 땅속으로 끌고 간다 나는 망원경을 들고 그것들을 꼼꼼하게 관찰한다 비 온 뒤 축축한 땅에 귀를 대면 누가복음이 들려온다 개미의 저녁 예배를 듣다가 저녁을 굶었다

나를 견딜 수 있게 하는 것들이 나를 견딜 수 없게 한다 그것들을 이해하지 않기 위해 나에게 살고 있는 시간은 무간(無間)이다라고 불러본다

내가 살았던 시간은 아무도 맛본 적 없는 밀주(密酒)였다 나는 그 시간의 이름으로 쉽게 취했다

유년은 생의 르네상스다 내가 이슬람교도였다면 나는 하루 여섯 번 유년이라는 메카를 향해 절을 올렸을 것이다 어릴 적 나는 저수지에 빠져 죽을 뻔한 적이 있었다 그 때 나는 한순간 너무 많은 것을 겪어버렸다 수면으로 가라앉으면서 바라보던 물 밖의 멀어지던 빛, 그것을 상상할 수 있는가? 학교에 가지 않고 물속에서 손바닥을 펴 죽은 새들을 건져올리며 나는 그 열락을 기억해냈다 중학교에 들어가서까지 어머니의 젖맛이 기억나지 않아 나는 새벽에 자고 있는 어머니의 가슴을 물어본 적이 있다

내 고통은 자막이 없다 읽히지 않는다

모든 사진 속에는 그 사람이 살던 시절의 공기가 고여 있다 따뜻한 말 속에 따뜻한 곰팡이가 피어 있듯이 모든 영정 속에 흐르는 표정은 그 사람이 지금 숨쉬고 있는 공기다 영정을 보면서 무엇인가 아득한 기분을 느낀다면 내가 그를 느끼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지금 이곳을 느끼고, 기억해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애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이쪽으로 전해지는 것이다 나의 영정엔 어떤 공기가 흐를까? 이런 생각을 할 때 내 두 눈은 붉은 공기가 된다

사진 속으로 들어가 사진 밖의 나를 보면 어지럽다.
시차(時差)때문이다

죽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나는 나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할 것 같다
너무 많은 죽음이 필요했기에 당신조차 들여다보지 않는 질서 속으로 나는 걸어가고 있다

방 안의 촛불이 눈 속에 공기를 모두 연소하고 있다
촛불은 다른 불빛들과 이웃하지 않는다. 이것이 촛불이 밤에만 피는 까닭이다

1976~? 나와 생멸을 같이할 행성이 있다고 믿는다 그것은 나의 에테르다

수음을 하는 동안 몇천 년 나는 늙어간다
수음을 하는 동안 나는 나라는 문명이 슬프다

너와 내가 뜨겁게 안는 순간 문득 우리가 죽는다면 몇천 년이 지나 우리는 화석이 될것이다 그리고 후세 사람들은 박물관에서 신기하다는 듯이 우리를 만질 것이다 거칠고 딱딱한 질감에는 슬픔이 담기지 않는다 이것이 나의 분노다 나는 비로소 천 년이 지나 사람들이 우리를 만질 때 돌 밖으로 눈물을 흘릴 것이다 그것은 너와 나 사이의 야만이다

기억의 속도는 빛의 속도보다 빠르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일이란 한 번 자살하는 것과 같다 익숙했던 모든 것들과 생이별하는 것이다 저승을 두려워하는 것은 그곳의 모든 것이 내가 사랑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낯선 곳에서 잠을 잘 자지 못한다 낯선 곳에서 자는 일이란 저승에서의 하룻밤과 같다 사람은 그 사람이 살아온 생에 다름 아니므로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일이란 내가 한 번 자살하는 것이다 내가 아는 칸은 이렇게 말했다 그것이 빛의 속도보다 빠르게 다가올 때가 있다

바람이 한 페이지의 얼굴을 넘기며 간다 동풍은 과묵하다 불안은 자기표현의 정직한 양식이다 내가 매일 맞는 주사는 동쪽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같다

간밤에는 부대를 빠져나와 대원들과 어울려 무덤을 팠다 삽날이 두개골에 닿았을 때 나는 낙타를 떠올렸다 사막을 가다가 모래처럼 허물어졌을 낙타, 10리 밖에서는 사람 냄새가 났다 무덤에 묻혀 있던 그의 뼈를 구워 점을 쳤다 그는 은(殷)나라 사람이었다 시를 썼고 세상을 돌아다니며 절벽만을 그리는 화가였다 꿈은 어떤 지도에도 나와 있지 않은 유배지다

저 자신의 내면을 도굴하는 것이 꿈이라면 사람들은 꿈이라는 실형을 살고 있는 셈이다 위험한 짓인 줄 알면서도 사람들은 그곳을 다녀올 때마다 다른 비석(飛石)을 세우고 온다 그리고 거기서 데려온 기억의 비문을 문득 추억이라 부른다

기억이란 인간의 두번 째 생이다 인간은 기억을 기다릴 뿐 기억을 소유할 수 없다 모든 기억은 불구이기 때문이다

하늘은 지금 분홍천(川)이다 저녁만 되면 병동의 사람들은 예배처럼 창을 열고 저 노을을 가슴에 버린다 창살을 통해 마지막일지 모를 일몰을 바라보며 쓴 사형수의 수기보다 더 아름다운 시(詩)는 아직 없다 그것은 죽어가는 자의 음악이기 때문이다 나는 죽어가는 것들에게서 나오는 음악을 베토벤이라고 누군가에게 고백한 적이 있다 베토벤은 저 자신이 음악이었다 그는 음악을 만들지 않았다 그는 절박했을 뿐이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귀신이 되는 생도 있겠으나 귀신으로 태어나 자신이 죽은 줄도 모르고 이 세상을 살다가 어느 날 자신도 모르게 사라져버리는 생들이 있다는 것을 믿는다 그 음악을 향해 나의 원시는 바쳐진다 이렇게 시작하는 시(詩)를 쓰고 싶어질 때가 있다

빛을 보아서는 안 될 운명을 가진 뱀파이어 부부가 죽기 전 스스로 햇볕 아래로 기어가 서로 끌어안고 부서진다 단 한 번 빛을 보기 위해 그토록 많은 피가 필요했던 것이다

나는 누가 뭐래도 수천 번의 밤을 경험했다
나는 밤에 태어났고(T) 밤에 자랐으며(T) 밤에 시를 썼다(T) 이 사실만으로도 지구에서는 아득할 만하다(F) A=A-

지구에서는 시인의 별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시인의 별에서는 지구가 보인다

사이다에 지렁이를 한 웅큼 담그고 마셔버린 나의 이종 삼촌은 자신이 목성에서 왔다고 했다 지금도 나주 백병원에 가면 고모할머니가 가져다준 한약 봉지를 하나씩 개수구에 버리고 있다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고. 삼촌은 이제 마흔이 다 되어 무섭게 음식만을 탐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는 지구에 와서 배운 것이 휘파람뿐이라고 했다 전남대학교 천문학과 83학번을 수석으로 입학한 삼촌은 휘파람을 잘 불었다 그 삼촌과 나는 어릴 적 「로보캅 2」를 함께 보고 나란히 화장실서 로보캅처럼 오줌 누던 기억이 있다

아침마다 눈을 뜨면 마른 사타구니를 만지며 괴롭다 내게서 꿈이라는 혐의를 빼면 대체로 나는 무죄이다 내가 이곳에 있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며 복도를 돌아다니다가 생이 끝장날 것 같다 “개자슥 엄마를 불러!” 면회 온 엄마를 불렀다고 고막이 터지게 맞던 나의 아름다운 후임병(99-71002665)은 누구에게나 거짓말이 늘어갔다

달뜬 밤 기숙사 창틀에 앉아 비누를 갉아 먹다가 실려온 저 대책 없이 아름다운 옆방 소녀는 밤마다 쥐가 된다 하수구에서 시궁쥐처럼 발견되었을 때 사람들은 아무도 소녀에게 인공호흡하지 않았다 소녀의 흰 발목과 소녀의 살짝 드러난 하얀 허리 사이에는 시커먼 털들이 무성했다. 젖은 바지는 그 무참함을 가릴 수 없었다. 소녀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벌벌 떨고 있었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무성한 허벅지 털의 색감과 질감까지 포용할 수는 없었다. 소문처럼.

방이 좁아서 더 이상 양떼를 부를 수 없다 서랍과 옷장에도 양떼가 꽉 찼다 내 양들은 물갈퀴를 달았다

어느 날 망막을 마개처럼 따 올리면 수천 통의 필름이 눈 밖으로 줄줄 흘러나올 것이라 믿는다 눈 안으로 빛이 들어가지 않고 있기 때문에 필름은 눈 속에 살아 있다 빛이 눈을 아프게 하는 건 눈은 깊고 어두운 성이기 때문이다 아침에 나는 커튼을 치지 않는다 병실은 늘 어둡다

한 번도 꽝꽝 언 하늘에 (鳶)을 날려보지 않은 사람과는 나는 놀지 않았다
찬송가를 백 곡 이상 안다고 하는 사람과는 나는 노래 부르지 않았다
부모의 주민등록번호를 줄줄이 암기한다는 사람과는 돈거래하지 않는다
그는 내게 불효를 할 게 뻔하기 때문이다
릴케의 뜨거운 서시(序詩)를 앞에 놓고 자위를 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사랑은 그대라는 성(城) 안으로 들어가 평생 시만 쓰며 살겠다는 것임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다 한 번도 나는 그런 사람을 살아보지 못했다

내가 아는 한 칸은 자신이 사랑하는 한 여자를 살리기 위해 소설에 주술을 걸어 그녀를 구할 것이라고 했다 칸은 매일 비명처럼 살아갔다 우리는 절박하게 부패해가는 생의 오류만을 시라고 불렀다 칸의 파오를 찾아가지 못한 지 오래다 나는 칸과 자고 일어날 때마다 목 졸라 죽이고 싶은 적이 몇 번 있었다 우리에게 생을 증거하는 것은 고통뿐이었지만 우리의 면죄부가 고통 그 자체일 순 없었다 이렇게 말하고 나면 우리는 근사한 기분이었다 칸과 나는 자웅동체처럼 웅크리고 자는 습관이 있다 배춧잎 같은 이불 위에서 깨어나면 그와 나는 SAM이 된다 현실은 죄지은 것도 없이 우리가 매일 써야 하는 삶의 조서다 우리는 붙어서 걸었고 매일 고개를 숙이고 조서를 썼다 이렇게 말하고 나면 죄짓는 기분이다

마크툽! 기억의 피라미드여 굳건하라 어떤 나든 함부로 파들어가면 묻힐지니 기억은 다 해독하면 곧 달아나야한다 금방 돌이 떨어지고 벽이 갈라지고 무너지기 때문이다 나는 기역(氣驛)이 무섭다

바람은 내가 알지 못하는 시간 속으로 유배된 자들이 내게 띄우는 편지다 잠이 오지 않는 밤 나는 창을 열고 침대 밑으로 기어들어가 그 편지를 읽는다 로비에서 소녀는 달력을 보기를 좋아했다. 그녀의 환자복을 파고들어 배를 부풀리던 바람은 어디서 온 편지일까?

소녀는음력달이완전히찼을때어두운계단입구에서혼자아이를낳았다내가그녀쪽으로조용히걸어갔을때그녀는거의움직일수없을만큼지쳐있었다너무어두웠기때문에내가누구인지도그녀는확인할수없는상태였다한손에는태를자른과도가힘없이쥐여있었다나는그녀에게다가오는그림자였고그녀도내가보지못한그림자를가진채누워있었다아이는울지 않았다나는그아이를안고내방으로천천히걸었다그녀가손을뻗어잠깐동안무엇인가알수 없는알타이어를중얼거렸지만이윽고그녀는조용히벽에비친내그림자만만지고있었다나는그아이의몸에밴어머니의피를젖대신먹였다새벽엔가축의젖을물렸다아이의몸에선라일락향이났다사람들의눈을피하기위해나는아침에아이를머리부터천천히삼켰다가저녁이면뱉어내서다시쥐의젖을물렸다아이는내안의굴에서낮에는박쥐처럼거꾸로매달려잤고밤엔내가읽어주는나의시를들었다아이는조금씩눈이멀어갔다아이가다자랐을때나는 갈매기의혼을넣어주었고아이는말의몸을빌려달력의초원으로달려갔다아이가떠나기전 내게당신시는영하라고했다나는아이가떠난후쓸쓸해서몽골어를배워보려고했지만곧그만두었다달력에서쏟아지는눈으로방이얼었다

눈물은 자기 안의 빙하가 녹는 것이다 차가워지려면 뜨거워지는 헤엄부터 배워야 한다 뼈의 길을 찾아들어 섬광을 남기는 보검처럼. 칼은 뜨거우면서 차갑기 때문에 멀고 깊은 곳까지 흐를 수 있다 밖으로 나오는 울음은 뜨거워서 타인의 마음을 베지만 안으로 우는 울음은 자신을 베기 때문에 차갑다 눈물은 제 안의 썩고 있는 어류(魚類)들이다

하늘은 스콜라 철학처럼 흐른다 구름은 제3의 물결이다 바람은 바카디151처럼 독하다 나무들은 루마니아 전설처럼 고요하다 숲은 한물간 산부인과처럼 조용하다 안개는 논리가 없고 태양은 실천 중이고 호수는 냉소적이다 먹어야 할 알약은 베이컨적이고 경험하지 못한 진실은 아직 내 앞에 평등하고 헤겔보다 나는 기도를 잘할 수 있고 내 기도가 더 형이상학적일 수 있고 1999년 6월 진해부두에서 감전돼 죽은 이 병장보다 돌계단은 차갑다 신은 관념을 품어서는 안 되고 나는 코펜하겐에서 태어나지 않았지만 내가 코펜하겐이라는 음악을 생각하는 동안 나는 코펜하겐이 되고 나는 불합리하기 때문에 무엇인가를 믿는다 설명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쓰고 설명하지 않기 위해 나는 울고 설명할 수 없는 것이 나의 유산이다 아무도 알 수 없는 외국어가 나고 나를 제대로 발음하고 나를 가지고 소통할 수 있다고 하는 사람은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나는 슬픔에 부상당했고 가난에 고문받았고 종교에 암살당했고 밤마다 임 병장의 자지를 만져주며 살아남았고 대신 매일 시로 자살했고 시로 미(美)를 매혹시켰다
방에 침을 퉤퉤 뱉는 또 한 마리 모기의 목을 땄다 모기의 뇌(腦)를 먹으면 장수한다는 중국 전설을 믿고 병 속에 모아놓은 모기의 머리들을 들고 소녀의 방문 앞에 놓았다 열쇠 구멍으로 소녀가 내 뒷등을 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죽으면 너는 꼭 나를 해부해야 한다 내 가슴을 절개하면 누구 말대로 내 가슴에선 수억의 인류들이 피에 뜬 채 죽어 있을 것이다

죽이고 싶은 버전이 몇 있다
너무 아름다운 시를 썼기 때문에 죽이고 싶은 버전이 있고
너무 시를 아름답게 보기 때문에 죽이고 싶은 버전이 있다
굴욕을 연민하는 시인은 제 자신의 삶이 한 권의 시집이어야 하고 그 시집은 자아의 병동이어야 한다 그것이 나의 버전이다

시인은 신이 놓쳐버린 포로다 그러나 포로는 늘 프로다 
내가 가진 유일한 능력은 너와 다르다는 것이다 내가 졌다! 라고 쓰는 것은
단지 이길 수가 없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나는 너와 다르다는 이유로 이곳에 산다
그것이 너한텐 꽤 중요한가 보다

잠자는 동안 창밖에서 수천 개의 붉은 눈알들이 나를 내려다본다는 것을 안다 손가락을 다 써버리고 잠든 밤, 내 몸을 빠져나온, ‘내가’ 배 위로 올라타서 두 눈을 뽑고 있는 것을 안다 눈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나는 늦은 아침까지 눈을 뜨지 않는 버릇이 있다 그가 다시 내 속으로 들어오고나면 나는 겨우 눈을 떠 등바닥에 시퍼런 핏물이 지나가는 것을 느낀다

나는 국적 없는 전쟁을 치르고 있는 병사다 나는 7월의 클라이맥스를 안다
나는 7월에 태어났기 때문에 7월의 음악들을 들으면서 죽어갈 것이다 내 유서는 7월 위에 쓴 나라는 시 한 줄뿐이다 내가 죽으면 세상의 7월은 수장될 것이다

나는 이런 것들을 느낀다
몇백 마일 떨어진 곳에서 마리아 상이 눈물 흘린다
몇백 마일 떨어진 곳에서 차에 치인 사람이 바닥에서 천천히 눈을 감는다
몇백 마일 떨어진 곳에서 장례식차 타이어에 바람이 빠지고 있고
몇백 마일 떨어진 늪에서 얼룩말이 악어 입속으로 천천히 들어가고 있다
몇백 마일 떨어진 전깃줄 위에 사람 하나 새들 사이에 끼여 날개에 고개를 파묻고 앉아 있고
몇백 마일 떨어진 창 속에서 누군가 탈고를 막 끝내고 숨이 멎었다
몇백 마일 떨어진 창 속에서 누군가 탈고를 막 끝내고 숨이 멎었다
몇백 마일 떨어진 곳에서 저승사자들이 지하철을 타고 이쪽으로 오고 있고
몇백 마일 떨어진 곳에서 자신의 출생을 알고 찾아온 아들이 어서 돌아가기를 바라는 어미는 초조하게 거실을 서성거린다
몇백 마일 떨어진 골목의 대문 앞에서 누군가 나처럼 서성거리고
오늘, 음악은 참 희곡 같다

그날 밤 나는 꿈을 꾸었다

나는 꿈속에서 어떤 호숫가에 앉아 있었는데 저 멀리서 상여를 메고 일단의 사람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사람들이 상여를 메고 호수의 차고 푸른 물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들이 그곳으로 들어가면 모두 죽을 것이었다. 나는 알 수 없는 공포를 느끼며 안 된다고 그들에게 소리쳤다. 그런데 그들은 내 목소리를 전혀 듣지 못했다. 나는 고래고래 소리쳐 불렀지만 그들에게서 냄새처럼 퍼져나오는 음악이 내 목소리를 그들에게 전혀 전달해주지 못했다. 그들은 한 명 한 명씩 물속으로 잠겨갔다. 그러다 문득 나는 상여를 메고 물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그들 모두의 얼굴이 내 자신의 얼굴이란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전부 눈동자가 없었다. 그러자 갑자기 나는 상여 속의 망자가 누군지 궁금해졌다. 나는 그들에게 달려가 상여를 덮고 있는 꽃천을 헤치고 관 뚜껑을 열어 보았다. 그곳에 나의 어머니가 누워 있었다. 한 그루 나무뿌리처럼 뻣뻣하고 말이 없었다. 목이 잘린 어머니는 자신의 머리가 아닌 내 머리를 옆구리에 단정히 끼고 있었다. 나의 얼굴이 어머니의 웃음을 가지고 있었다. 물 밖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울고 있었다. 난생처음 나는 나의 울음을 타인의 입을 통해서 들었다.



일 년 내내 비가 내리는 땅
귀를 씻고 이곳에 왔어요 구두를 벗고 맨발로 왔어요
낯선 언어들이 음악처럼 들리는 곳

당신들은 왜 나를 잡으려고 했을까요
이해하고 싶어라는 징그러운 거짓말의 덩굴
가위로 덩굴을 자르는 대신 쥐며느리처럼 몸을 말고 빠져나왔죠

당신들의 입맛대로 내 이름은 노랗다가 파랗다가
한 번도 진짜 이름을 알려준 적이 없는데도
거울 속 나는 그때그때 달라서 말하기 곤란했을 뿐인데

우리들은 모두 번쩍번쩍한 태양을 머리통에 박고 살지요
죽은 엄마는 달의 감정을 내 가슴에 달아주고 떠났어요 여느 엄마처럼
나는 달의 눈물을 말하고 싶었으나
태양의 빛이 너무 강렬하기에

일 년 내내 비가 내리는 이곳 빗소리가 아름다워요
푸른 앵무새는 고맙게도 매일 축축한 흙냄새를 물어와요
나의 달은 매일 울어요

비밀은 없죠
이곳의 언어가 하나둘 글자로 굳어지자 오해도 큼지막하게 쌓여
대문을 틀어막았네요 이제 나는 눈물이 되어 흘러나갈까요
가슴의 달은 둥둥 떠서 언제까지고 흐르겠죠

갈래머리를 땋았다가 올렸다가 겨울에게 물어봐요
나의 몸은 납작하지만 등뒤는 깊고 깊은 세계
구르고 울고 있는 나의 달
울고 있는 나의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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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휠체어 댄스

2016. 3. 27. 01:58


물은
이제 습관이 되었어요
하지만 그게
나를 다 삼키진 않았죠

악몽도
이제 습관이 되었어요
가닥가닥 온몸의 혈관으로
타들어오는 불멸의 밤도
나를 다 먹어치울 순 없어요

보세요
나는 춤을 춘답니다
타오르는 휠체어 위에서
어깨를 흔들어요
오, 격렬히

어떤 마술도
비법도 없어요
단지 어떤 것도 날
다 파괴하지 못한 것뿐

어떤 지옥도
욕설과
무덤
저 더럽게 차가운
진눈깨비도, 칼날 같은
우박 조각들도
최후의 나를
짓부수지 못한 것뿐

보세요
나는 노래한답니다
오, 격렬히
불을 뿜는 휠체어
휠체어 댄스







나는 온전한 외로움, 텅 빈 허공, 떠도는 구름.
나는 무심한 바람, 기슭에 닿지 못할 파도, 물 위에 밀려 올려진 빈 조개 껍질.
나는 지붕 없는 오두막 비치는 달빛, 언덕 위 헐리운 무덤 속의 잊혀진 사자, 우주 밖으로 흘러가는 작아지는 별.






어제 익힌 불안의 자세를 복습하며 한 시절에 대해 생각한다. 그것은 이제 막 떠올랐다 사라져버린 완벽한 문장. 영원히 되찾을 수 없는 언어의 심연. 시대에 대한 그 모든 정의는 버린지 오래. 내 시대는 내가 이름을 붙이겠다. 더듬거리는 중얼거림으로 더듬거리는 중얼거림으로. 여전히 귓가엔 둥둥 북소리. 내 심장이 멀리서 뛰는 것만 같다. 세계는 무의미하거나 부조리한 것이 아니다. 그냥 있는 것이다. 그냥 있는 것. 의심을 하려거든 네 자신의 눈을 의심하고 너의 귀를 씻어라. 언제나 우린 멀리 더 멀리 이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가고 싶었지. 극동의 쟈퐁으로 가자. 극동의 쟈퐁으로. 그러나 그대여, 누군가에겐 우리가 있는 바로 이곳이 극동이다. 일곱 계단의 정신세계. 식어버린 수요일의 요리를 먹고 얼굴을 가릴 망토도 없이 거리를 배회하던 날들. 차라리 녹아내리기를 바라던 유약한 심정으로. 시대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내가 가진 단어를 검열하는 오래된 버릇. 무한반복되는 기하학적 무늬의 영혼을 걸치고 혼자만의 아주 작은 구멍으로 빨려들어갈듯한 노랫말을 흥얼 거리며. 어제의 기억에 단호히 마침포를 찍는 사람의 마지막 타들어 가는 담배가 되고 싶다. 타닥타닥 타닥. 질 좋은 담배는 이런 식의 싸구려 발성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자신이 자신이 아닌 것처럼 생각하는 싸구려 발상법에 익숙하다. 구토라도 하듯 목구멍에서 말들이 쏟아져 내린다. 어머니가 울고 있다. 나비가 날고 있다. 너무 많은 바퀴 단 것들이 우루루 지나간다. 문득 비둘기 한 마리가 욕석을 퍼부으며 내 발치에 내려않는다. 구구구 구구구. 구구단을 외우고 좀 울어도 좋을 날씨. 한 시절을 생각할 때마다 오래전 잃어버린 문장 하나가 입속에서 맴돈다. 이 거리에서 몇 번 굴러야 할 지 몰라 두 번만 굴렀다. 앞으로 두 번 뒤로 두번, 반성 자책 자기 연민 고쳐 말하기는 오래된 나의 지병. 얼룩이 남는다고 해서 실패한 건 아니다. 한 시절을 훑느라 지문이 다 닳았다. 먼지 같은 사람과 먼지 같은 시간 속에서 먼지 같은 말을 주고받고 먼지같이 지워지다 먼지 같이 죽어가겠지. 나는 이 불모의 나날이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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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습관을 반복하듯 나는 창밖의 어둠을 응시한다, 그대는 묻는다, 왜 어둠을 그리도 오래 바라보냐고, 나는 답한다, 그것이 어둠인 줄 몰랐다고, 그대는 다시 묻는다, 이제 어둠인 줄 알았는데 왜 계속 바라보냐고, 나는 다시 답한다, 지금 나는 꿈을 꾸고 있다고, 그대는 내 어깨너머의 어둠을 응시하며 말한다, 아니요, 당신은 멀쩡히 깨어 있어요, 너무 오랜 고독이 당신의 얼굴 위에 꿈꾸는 표정을 조각해놓았을 뿐 


이 밤에 열에 하나는 어디론가 떠나고 열에 하나는 무척 외로워질 수 있다, 그리고 열에 하나는 흐느껴 울기도 한다, 이 밤에 그대와 내가 이별할 확률(=0.1×0.1×0.1)을 떠올리면 내 얼굴은 저 높이 까마득한 어둠 속 백동전으로 박힌 달 표면처럼 창백해진다, 나는 다만 시작과 끝이 불분명한 시간의 완곡한 안쪽에 웅크리고 누워 잠들고 싶은데, 지금 나는 내가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잊고 번민으로 오로지 번민으로 빠져들고 있는 것이다 


모든 병든 개와 모든 풋내기가 그러하듯 나는 운명 앞에서 어색하기 그지없다, 그대를 오랫동안 품에 안았으나 내 심장은 환희를 거절하고 우울한 예감만을 가슴 복판에 맹렬히 망치질하였다, 우연이란 운명이 아주 잠깐 망설이는 순간 같은 것, 그 순간에 그대와 나는 또 다른 운명으로 만났다, 그러나 운명과 우연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얽혀 있다 한들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우리는 지금 서로의 목전에서 모래알처럼 산지사방 흩어지고 있는데 


그대에게서 밤안개의 비린 향이 난다, 그대의 시선이 내 어깨너머어둠 속 내륙의 습지를 돌아와 내 눈동자에 이르나 보다, 그대는 말한다, 당신은 첫 페이지부터 파본인 가여운 책 한 권 같군요, 나는 수치심에 젖어 눈을 감는다, 그리고 묻는다, 여기 모든 것에 대한 거짓말과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한 진실이 있다, 둘 중 어느 것이 덜 슬프겠는가, 어느 것이 먼 훗날 불멸의 침대 위에 놓이겠는가, 확률은 반반이다, 확률이란 비극의 신분을 감춘 숫자들로 이루어진 어두운 계산법이 아닌가 


눈을 떴을 때 그대는 떠났는가, 떠나고 없는 그대여, 나는 다시 오랜 습관을 반복하듯 그대의 부재로 한층 깊어진 눈앞의 어둠을 응시한다, 순서대로라면, 흐느껴 울 차례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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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2

오병량, 꿈의 독서

2016. 3. 24. 15:40

방 안을 살피는 일이
잠자리를 들추는 일이 아니기를
책을 살피는 일이 문장을 소독하는 일이
아닌 것처럼 눈의 검은자가
흰자 위의 독백을 이해할 때
꿈이 찾는 조용한 가치들

선명한 여름인데 우리
찢긴 페이지처럼 갈피가 없어
너는 말없이 울고 빗물에 젖은 새처럼 흐느끼고
하마터면 내 눈에 쏟아질 것 같은 널 안고
팔베개를 해주었지
책을 보았는데, 꿈은
커다란 구렁이를 목에 휘감고 자는 일이래
그럼 무섭지 않아요?
너와 나 우리 모두가 그런 거라면
그렇지 않다고 나는 말해주었지
용기가 난 듯, 너는 넘어진 책장을 일으켜 세운
지난 밤 꿈 얘기를 했는데, 불길한 눈을 가진
계집애를 보았다고 분명
어려움이 닥칠 거라며, 그새 잠이 들고 말지만

아득하고 따스한 너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니?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 네가 말하는 걸
나는 분명 들었으면서 잠이 들고 싶었지
내 옆에서, 나는 너와 만났고
꿈이면 어때, 널 끌어안은 내가
열린 입술로 다시 어두운 구멍으로 깊이 파묻힌대도
질식해도 좋아! 오독은 치유의 병이니까,
나는 자신이 들었던 거야

꿈이 무엇일까, 생각해서
참으로 오래된 직업 같다 여겨지는 날이었어
점자를 만들다 맹인이 된 한 남자를 떠올리면
눈이 새긴 다른 눈자위를 더듬다
눈이 먼 남자가 있가도 믿게 되면 목각은
눈보다 마음이 먼저 세운 일 같아
남몰래 우는 날보다 우는지도 모르게 자던 일이
더욱 꿈만 같은 너였지

꿈이 꿈을 덮는 일이 하루가
하루를 접은 일이 마치 구렁이의 머리를 물거나
꼬리를 먹고서 천천히 소화시키는 직업이라면
혀를 내밀어 똬리를 트는 몸짓은
잠결에 두고 간 누군가의 포옹일지도 모르겠다고 가만
가만히 눈을 맞추며 읽고 또 앓아야 했어
꿈이라는 독서를

왜? 너는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슬픈 고백은
꿈에서만 하기로
그러니 그 밤, 책을 꼭 안고 잠들면
너는 얇고 보드랍고
어떻게든 내 것 같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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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나는 잘 말린 무화과나무 열매처럼 다락방 창틀 위에 조용히 놓여 있었다. 장례식 종이 울리고 비둘기 날아오를 때 불구경 간 엄마는 돌아오지 않았다. 오빠는 일 년 내내 방학. 조울을 앓는 그의 그림자는 길어졌다 짧아졌다 짧아졌다 길어졌다. 넌 아직 어려서 말해 줘도 모를 거야. 내 손바닥 위로 무화과나무 열매 두 개를 떨어뜨리고 오빠도 떠나갔다. 기다리지도 않는데 기다리는 사람이 되는 일은 무료한 휴일 한낮의 천장 모서리같이 아 득했다.


오빠가 떠나자 남겨진 다락방은 내 혼잣말이 되었다. 열려진 창밖으론 끝없는 바다. 밤낮 없이 울고 있는 파도 파도. 주인을 잃은 마호가니 책상 위에는 연두 보라 자주 녹두 색색 종이테이프 지우개 연필 증오 수줍음 비밀 비밀들. 도르르 어둠의 귓바퀴를 감아 넣듯 파랑파랑 종이꽃을 접으며 나는 밤마다 오빠의 문장을 읽었다.


누구에게도 보내지 않을 편지를 쓰고 또 쓰는 밤.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미워하는 고백의 목소리. 오빠의 공책 위로 지우개 가루가 검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돌아오지 않는 것들은 언제까지 돌아오지 않는 것들일까. 기다리는 것들은 언제까지 기다리는 것들일까. 어제의 파도는 어제 부서졌고 오늘의 파도는 오늘 부서지고 내일의 파도는 내일 부서질 것이다.


모두 어디에 계십니까. 모두 안녕히 계십니까.

밤이면 착하고 약한 짐승의 두 눈이 바다 위를 흘러 다녔다. 끝없이 밀려갔다 밀려오는 물결들. 끝없이 밀려왔다 밀려가는 가없음. 그것이 나를 울면서 어른이 되게 했다. 열매를 말리는 건 두고두고 먹기 위해서지. 잘 말린 무화과나무 열매를 씹으며 나는 자라났고 떠나간 사람들보다 더 많은 나이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땐 또다시 무화과나무 열매의 계절이 돌아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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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찬, 종로사가

2015. 12. 7. 19:12



앞으로 우리 자주 걸을까요 너는 다정하게 말했지 하지만 나는 네 마음을 안다 걷다가 걷다가 또 걷다가 우리가 걷고 지쳐버리면, 지쳐서 주저앉으면, 주저앉은 채 담배에 불을 붙이면, 우리는 서로의 눈에 담긴 것을 보고, 보았다고 믿어버리고, 믿는 김에 신앙을 갖게 되고, 우리의 신앙이 깊어질수록 우리는 깊은 곳을 빠져나올 수 없게 되겠지 우리는 이 거리를 끝없이 헤매게 될 거야 저것을 빛이라고 불러도 좋다고 너는 말할 거다 저것을 사람이라고 불러도 좋다고 너는 말할 거고 그러면 나는 그것을 빛이라 부르고 사람이라 믿으며 그것을 하염없이 부르고 이 거리에 오직 두 사람만 있다는 것, 영원한 행인인 두 사람이 오래된 거리를 걷는다는 것, 오래된 소설 같고 흔한 영화 같은 것, 우리는 그러한 낡은 것에 마음을 기대며, 우리 자신에게 위안을 얻으며, 심지어 우리 자신을 사랑하게 될 수도 있겠지 너는 손을 내밀고 있다 그것을 잡아달라는 뜻인 것 같다 손이있으니 손을 잡고 어깨가 있으니 그것을 끌어안고 너는 나의 뺨을 만지다 나의 뺨에 흐르는 이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리겠지 이 거리는 추워 추워서 자꾸 입에서 흰 김이 나와 우리는 그것이 아름다운 것이라 느끼게 될 것이고, 그 느낌을 한없이 소중한 것으로 간직할 것이고, 그럼에도 여전히 거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 그런 것이 우리의 소박한 영혼을 충만하게 만들 것이고, 우리는 추위와 빈곤에 맞서는 숭고한 순례자가 되어 사랑을 할 거야 아무도 모르는 사랑이야 그것이 너무나 환상적이고 놀라워서, 위대하고 장엄하여서 우리는 우리가 이걸 정말 원했다고 믿겠지 그리고는 신적인 예감과 황홀함을 느끼며 그것을 견디며 끝없이 끝도 없이 이 거리를 걷다가 걷고 또 걷다가 그러다 우리가 잠시 지쳐 주저앉을 때, 우리는 서로의 눈에 담긴 것을 보고, 거기에 담긴 것이 정말 무엇이었는지 알아버리겠지 그래도 우리는 걸을 거야 추운 겨울 서울의 밤거리를 자꾸만 걸을 거야 아무래도 상관이 없어서 그냥 막 걸을 거야 우리 자주 걸을까요 너는 아직도 나에게 다정하게 말하고 나는 너에게 대답을 하지 않고 이것이 얼마나 오래 계속된 일인지 우리는 모른다



황인찬, 종로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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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미, 호른과 기차

2015. 11. 20. 07:05
너는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퇴장한 무대에 남겨진 
의자 같고, 
의자 위에 두고 간 호른 같고. 

너의 슬픔은 검은 산처럼 깊고 
늙은 소녀의 머리카락처럼 길다. 
머리카락이 발까지 자라 흐르는 물. 

너를 기쁘게 하는 방법을 몰라서 나는 너의 말을 듣고 있다. 
토끼처럼 귀가 자라도록 들었지만 
너의 슬픔은 손톱 반달만큼도 줄어들지 않았다. 그래서 
나의 귀도 슬프겠구나. 

너는 네가 메고 태어난 낡은 가방이 슬프고 
가방 안에 든 우윳빛 털실 뭉치가 포근해서 슬프고 
낡은 가방을 멘 너를 슬퍼하는 눈길 때문에 또 슬프다. 

퍼덕거리는 물고기들을 
양동이에 퍼 담았지만, 물이 없어 금세 죽어버렸다. 
너는 목소리를 차가운 보도블록 바닥에 떨어뜨렸다. 

네가 부르는 노래는 눈 덮인 하얀 철로. 
나는 기차에 너를 싣고 달린다. 칙칙폭폭 소리를 내기 위해서 밤으로 난 철로 위를. 

기차는 터널로 들어간다. 
짐승들은 터널에서 맘껏 운다. 
너는 자격이 있다. 

철로 옆에서 아이들이 작은 손을 흔든다. 
내게 저런 작은 손이 있어 
양동이에 하얀 눈을 담아서 너에게 주었으면. 
이빨을 드러내고 웃을 만큼 충분한 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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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경, 수박

2015. 10. 25. 17:27



아직도 둥근 것을 보면 아파요 

둥근 적이 있었던 청춘이 문득 돌아온 것처럼 


그러나 아휴 둥글기도 해라 

저 푸른 지구만 한 땅의 열매 


저물어 가는 저녁이었어요 

수박 한 통 사들고 돌아오는 

그대도 내 눈동자, 가장 깊숙한 곳에 

들어와 있었지요 


태양을 향해 말을 걸었어요 

당신은 영원한 사랑 

태양의 산만한 친구 구름을 향해 말을 걸었어요 


당신은 나의 울적한 사랑 

태양의 우울한 그림자 비에게 말을 걸었어요 

당신은 나의 혼자 떠난 피리 같은 사랑 


땅을 안았지요 

둥근 바람의 어깨가 가만히 왔지요 

나, 둥근 수박 속에 든 

저 수많은 별들을 모르던 시절 

나는 당신의 그림자만이 좋았어요 


저 푸른 시절의 손바닥이 저렇게 붉어서 

검은 눈물 같은 사랑을 안고 있는 줄 알게 되어 

이제는 당신의 저만치 가 있는 마음도 좋아요 


내가 어떻게 보았을까요, 기적처럼 이제 곧 


푸르게 차오르는 냇물의 시간이 온다는 걸 

가재와 붕장어의 시간이 온다는 걸 

선잠과 어린 새벽의 손이 포플러처럼 흔들리는 시간이 온다는 걸 

날아가는 어린 새가 수박빛 향기를 물고 가는 시간이 온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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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종일 굶었죠 버스를 타고 광화문을 가는데 어지러웠어요
시간이 없어 난 식은땀을 흘리며 걸었어요 배가 고팠어요
비가 그친 하늘 시퍼런 얼굴을 하고 식은땀이 쏟아지듯 빌딩들이 헉헉거렸어요
어지러워요 어지러워요 글자를 제대로 쓸 수가 없네요
그래도 뭔가를 해야 해요
살려면,이유는 없어요.목숨은 헐떡이며 노래해요
아버지,나는,나는 고무 타는 냄새를 맡으면 배가 고파요
구역질을 참는 게 인생이라고요?
서서 우는 사람 서서 자는 사람 서서 죽는 사람 서서 죽는 사람처럼 나무들은 울어요
일 없이 나는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아요
누구나 살기 위해서 살아요 다른 모든 것은 거짓이에요
그만하세요 떠올려요 떠올려요 무엇인가 다시는 하고 싶지 않아요
사람을 버리고 싶어요 사람을 버리고 싶다가도,비난이 두려워 나는 사랑을 버렸죠
용의자처럼,불안으로 살아요 불안이 나를 식량으로 만들었어요
아직 안 잡혀서,못 잡혀서 그게 불만이죠 불안이죠 
내 남은 손엔 술이 있어요 불이 있어요 집으로 돌아와요
구역질을 참으며,속아 주며 빈민가의 불빛은 얼굴을 밝혀요
여기 살아요 벗어날 수 없죠 보금자리,잘 아는 친구처럼 웃으며 인정해야죠
식은 땀이 흘러요 약을 먹으니,기억나지 않네요
어떤 글을 썼는지 그렇지만 종일 굶어서 나는 살았어요
늘 감사해요 아버지 오늘도,원망하지 않죠 내가 만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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