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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트료시카 / 햇빛

2018. 8. 9. 19:19
마트료시카, 이준규

창을 조금 연다. 언젠가, 너는 마트료시카를 가지고 싶다고 했다. 나는 그것이 무어냐고 했다. 너는 러시아 인형이라고 했다. 너는 중국 인형도 좋아했다. 나는 너에게 중국 인형이라는 노래를 들려주고 중국 인형이라는 소설도 얘기해주었다. 너는 모두 마음에 든다고 했다. 나는 오늘 고케시를 보았다. 일본 인형이다. 나는 그것을 너에게 주고 싶다. 귀엽고 오래되고 조금 두려운 것으로. 그날, 비는 내리지 않았다. 나는 너에게 나의 숲을 주고 싶었다. 조금도 두렵지 않은 완전한 숲을.

햇빛, 박지혜

너에게 개미를 말했다. 마트료시카를 말했다. 고래를 말했다. 그것은 좋았다. 그것엔 대부분 울거나 웃을 수 있었다. 너는 내 손을 잡고 끝없는 길을 끝없이 걸어갔다. 언덕이 반복되는 들판을 그리며 늘어나는 복도를 바라보며. 너는 나에게 너의 숲을 주고 싶어 했다. 조금도 두렵지 않은 완전한 숲을. 우리는 끝이 없었다. 끝을 알 수 없었다. 이제 곧 모든 게 끝날 거라는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왠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일요일을 말했다. 푸른꽃을 말했다. 일렁이는 흰빛을 따라가며 불타는 숲으로 들어가며. 너는 내 손을 잡고 끝없는 길을 끝없이 걸어갔다. 우리는 끝이 없었다. 오직 그것만 알았다. 아무리 해도 그것만 알았다. 저녁이 되면 색색의 알약을 버린다. 10월에는 체리블로섬을 바르고 너를 만나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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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희, 안녕

2018. 6. 5. 22:10

스페인에서 온 엽서에는 흰 벽에 햇살이 가득했고 맨 마지막 안녕이란 말은 등짐을 지고 가파른 골목을 오르는 당나귀처럼 낯설었다. 내 안녕은 지금 어디 있는가 가만히 몸을 만져본다. 두꺼운 책처럼 아무도 오지 않는 저녁 그 어떤 열렬함도 없이 구석에서 조용조용 살았다. 오늘 내게 안녕을 묻는 이의 이름을 떠올린다. 그에게 수몰된 내 마음 보였던가. 구석에서 토마토 잎의 귀가 오래도록 자란다고 말했던가. 내 몸의 그림자는 구석만을 사랑하는지 구석으로만 자란다는 말을 했던가. 내 안녕은 골목 끝에서 맨드라미를 만나 헛꿈들을 귓밥처럼 파내던 날 죽어버렸다고, 물은 결국 말라서 죽는다고 말했던가. 나는 누군가에게 안녕이란 말을 했던가. 더는 물어뜯고 싶지 않다고 조용히 말했던가. 안녕을 묻는 일은 물속을 오래 들여다보는 일 같다고, 물속에 대고 이름을 불러주는 일, 그리하여 물속에 혼자 집 짓는 일이라고 말했던가. 안녕, 그 말은 맨발을 만지는 것처럼 간지러웠지만 목을 매고 싶을 만큼 외로웠다고 비명처럼 말했던가, 말을 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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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미, 마트로시카

2017. 12. 10. 16:03


늦은 새벽 애인이 울며 잠 속으로 전화를 걸어온다 깨어보니 아무도 없어, 이 방 가득 나 혼자뿐이야 비가 오는데, 그림자조차 없이……

나는 조용히 답한다 세상에 발자국 하나 남기지 않고 살다 가는 기린처럼 모두 방 하나에 자신을 영영 가둬두고 산다고 그 안에서 나를 낳고 또 낳아 비좁은 방이 나로 가득할 때, 아귀가 딱 맞는 몸들 속으로 기어들어가 후우, 숨 내뿜으면 입안에서 흘러넘치는 어둠의 덩어리들

비가 오는데, 수만 겹으로 저를 복제하는 빗방울 속에서 두 발이 자꾸만 사라지는 새벽 세상에 발자국 하나 남기지 못하는 수십 개의 몸을 이끌고 전화를 받는다 겹겹의 몸속에 갇혀 웅웅 거대한 울음의 힘으로 자전하는 지구의 검고 어두운 내부에서, 애인이 늦은 새벽 잠을 깼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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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인, 종이 상자

2017. 12. 9. 21:22



상자를 만들어요. 십 년 됐어요. 당신에게 주려고요.



 상자는 잔디밭에 있어요. 흔들리지 않는 잔디 풀 옆에. 혼자 흔들리는 잔디 풀 옆에. 아니, 흩어지는 구름 아래. 매애애애 하나로 뭉쳐져 똑같은 모양이 되는 양 떼들 아래. 아니, 올라가는 층계. 아니, 내려가는 층계. 그곳에 상자는


 없어요. 아름다운 잔디밭엔 잔디가 없어요. 안녕, 엄마, 안녕, 동생아. 이제 자러 갈 시간이야. 다 버렸어요. 새 장난감들로 채웠어요. 아니, 아니, 상자 말구요. 상자는


 말이 없어요. 당신은 다 알고 있지요? 나는 칠월의 무성한 포도 넝쿨, 상자에 묶인 어여쁜 빨강 리본을 그리워해요. 상자엔 빨갛고 기다란 싸구려 노끈, 노끈 아래엔 물고기 시체. 혹시 울어요? 물속같이?


 종이가 금방 찢어질 것 같아요. 상자를 만들어요. 십 년 후에요. 당신에게 주려고요. 오직 당신을 위해 찢길 상자 하나를. 당신도 알지요? 십 년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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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처음 만났던 날부터 당신을 조각내었다

함께 떠나고 싶었기 때문에

당신을 온전히 담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매일 밤 당신을 잘라내었다

그리고 울었다


2

나는 당신의 손, 당신의 발, 당신의 무릎, 당신의 가슴을

여덟 개의 트렁크에 담았다

통후추를 싫어한 당신 때문에 월계수 잎을 바닥에 깔고 신선한 비닐을 한 겹 더 깔았다

헬리콥터가 높이높이 올라가자 당신의 손이 물었다

얼마나 가야 해? 

아직 하늘을 세 개 밖에 건너지 않았어요

당신의 손은 하품을 하며 잠이 들었다

잘 널어놓은 구름 위로 어린 내가 더 어린 당신이, 낚싯대를 메고 걸어가고 있었다

내 손에 들린 양동이에는 빨간 장갑이 담겨 있고

깔깔거리는 당신의 웃음이 찰랑거리고

꾸들꾸들해진 구름 한 덩어리 뛰어 건너자

굳은 얼굴의 당신이, 주름진 내가 그냥 서 있었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3

평생 고기를 썰어온 정육점 주인이 자신을 랩으로 말아 붉은 고기 써는 기계에 다리부터 밀어넣었다는 내용은 아주 숭고했다


4

중력을 이기고 날아오르기 위해 비행기는 초월적인 힘으로 달린다

지상으로 곤두박질치지 않기 위해 초월적인 힘으로 달린다

당신의 발이 중얼거렸다

가볍게, 어떻게 사랑이 무거울 수 있지?

당신의 가슴이 말했다

머리를 날려버리는 커다란 프로펠러를 향해 돌진할 수 있었다면 아마 공중 계단을 밟았을지도

당신의 무릎을 껴안고 내가 중얼거렸다

우린 우리의 무게를 견디어야 해요 곧바로 서 있으려면요

당신의 무릎이 다정하게 대답했다

당신의 손은 아무 말 없이 곤히 자고 있었다

아무 말 없이


5

무럭무럭 김이 나는 허공  

우리가 하늘로 띄워보낸 테루테루보즈들이 둥둥 떠다녔다

하나씩 하나씩 비를 머금고 아득한 저 아래로 내려갔다

이제 다 온 것 같아요 당신은 준비가 되었나요?

응. 당신의 발이 대답했다

나는 조그만 낙하산을 단 당신의 발을 허공으로 보내주었다

풍선을 잔뜩 단 당신의 가슴을 보내주었다

커다란 우산을 꽂은 당신의 무릎을 내려주었다

가장 아름다운 테루테루보즈를 매달아 당신의 손을 놓아주었다

안녕, 공중 계단을 따라 아주 맑은 곳으로 가길 바래요 무한한 신성의 땅… 그런 곳

안녕, 나는 너무 무거운 존재였나 봐요 이제 같이 갈 수 없어요

프로펠러 소리에 온몸이 덜덜 떨려요

살덩이가 잘근잘근 씹히는 것 같아요

천천히, 당신이 떠나고 있었다


6

혼자 타는 시소처럼 한쪽으로 기울었던 우리들 사랑의 중력-그것의 무게는 얼마일까 

자신을 썬 정육점 주인은 자기애의 중력을 알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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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숙, 안녕히

2017. 11. 24. 16:06
이 햇빛 속에 이제
그녀는 없다
햇빛보다 훨씬 강한 것이
그녀를 데려갔다
 
이제 더 이상 더 그녀를 저버리지 않아도 된다
내가 너무 저버려서
그녀는 모든 곳에 있고
어디에도 없다
 
저를 용서하세요
당신이 이해할 수 없었던 것들,
당신을 이해할 생각도 없었던 것들,
무례하고 매정한 것들을.
 

그녀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다
그녀가 무엇을 좋아했을까?
그녀에게 쥐어드려야 했던 것이 무엇이었을까?
아, 나도 무엇 하나 가진 것이 없었다
마음조차도. 그녀에겐 마음이 있었는데,
 

그녀가 빈손을 맥없이 뻗어
죽음은 그녀의 손을 꼭 쥘 수 있었다
아무도 잡아주지 않은 텅 빈 손으로
당신은 그 손을 꼬옥 쥐었다.
 
안녕히, 안녕히, 안녕히,
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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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경, 레몬

2017. 11. 21. 23:09

당신의 눈 속에 가끔 달이 뜰 때도 있었다 여름은 연인의 집에 들르느라 서두르던 태양처럼 짧았다

당신이 있던 그 봄 가을 겨울, 당신과 나는 한 번도 노래를 한 적이 없다 우리의 계절은 여름이었다

 

시퍼런 빛들이 무작위로 내 이마를 짓이겼다 그리고 나는 한 번도 당신의 잠을 포옹하지 못했다 다만 더운 김을 뿜으며 비가 지나가고 천둥도 가끔 와서 냇물은 사랑니 나던 청춘처럼 앓았다 

 

가난하고도 즐거워 오랫동안 마음의 파랑 같을 점심식사를 나누던 빛 속, 누군가 그 점심에 우리의 불우한 미래를 예언했다 우린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우린 그냥 우리의 가슴이에요

 

불우해도 우리의 식사는 언제나 가득했다 예언은 개나 물어가라지, 우리의 현재는 나비처럼 충분했고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그리고 곧 사라질 만큼 아름다웠다 

 

레몬이 태양 아래 푸르른 잎 사이에서 익어가던 여름은 아주 짧았다 나는 당신의 연인이 아니다, 생각하던 무참한 때였다, 짧았다, 는 내 진술은 순간의 의심에 불과했다 길어서 우리는 충분히 울었다

 

마음 속을 걸어가던 달이었을까, 구름 속에 마음을 다 내주던 새의 한 철을 보내던 달이었을까, 대답하지 않는 달은 더 빛난다 즐겁다

 

숨죽인 밤구름 바깥으로 상쾌한 달빛이 나들이를 나온다 그 빛은 당신이 나에게 보내는 휘파람 같다 그때면 춤추던 마을 아가씨들이 얼굴을 멈추고 레몬의 아린 살을 입안에서 굴리며 잠잘 방으로 들어온다

 

저 여름이 손바닥처럼 구겨지며 몰락해갈 때 아, 당신이 먼 풀의 영혼처럼 보인다 빛의 휘파람이 내 눈썹을 스쳐서 나는 아리다 이제 의심은 아무 소용이 없다 당신의 어깨가 나에게 기대어오는 밤이면 당신을 위해서라면 나는 모든 세상을 속일 수 있다 

 

그러나 새로 온 여름에 다시 생각해보니 나는 수줍어서 그 어깨를 안아준 적이 없었다

후회한다

 

지난 여름 속 당신의 눈, 그 깊은 어느 모서리에서 자란 달에 레몬 냄새가 나서 내 볼은 떨린다 레몬꽃이 바람 속에 흥얼거리던 멜로디처럼 눈물 같은 흰 빛 뒤안에서 작은 레몬 멍울이 열리던 것처럼 내 볼은 떨린다

 

달이 뜬 당신의 눈 속을 걸어가고 싶을 때마다 검은 눈을 가진 올빼미들이 레몬을 물고 레몬향이 거미줄처럼 엉킨 여름밤 속에서 사랑을 한다 당신 보고 싶다, 라는 아주 짤막한 생애의 편지만을 자연에게 띄우고 싶던 여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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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희경, 오늘은

2017. 11. 17. 01:04
 오늘은, 날이 참 좋구나, 라는 말씀이 있었다. 나는 어쩔 줄 몰랐다. 그런 날도 있어야 하지 않겠니, 아니 그게 아니라...... 오늘은 하늘이 참 파랗구나. 거실은 어두웠다.
 
  아플 때마다 그늘이 생각나 바람이 불면 휘우듬 기울어지는 그녀. 어릴 땐 울지 못하고 다 커서 우는 게 뭘까. 개구리? 아니 사람. 사람이? 그래 사람이, 그렇게 살아. 거짓말. 너는 몰라. 내가 뭘 모르는데. 좀 더 어른이 되면 알 수 있어. 꼭 침대에 누워 있는 엄마처럼, 말하는구나. 그늘을 내내 앓는 창문
 
  컵에 물을 따르는데, 내가 울고 있어서 깜짝 놀랐다. 좀더 어두워진 거실에서. 잠깐만, 너는 내가 아니니? 하고 물었다. 컵에선 물이 넘쳐흐르고, 나는 울고, 대답하지 않는다. 어둑어둑해진 거실에, 너무 많은 햇빛처럼. 그치지 못해? 컵을 집어던졌다. 깨진 것은 컵이 아니라 다 담지 못한 물. 나는 너무 슬퍼서 더, 좀더
 
  그러니 가말 수밖에. 너무 많은 답장처럼 추워, 몸을 떨었다. 누가 있는 걸까. 복도를 텅텅 울리며 지나간다. 모든 것이 비뚤어진다. 말씀은 더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았다. 날은 이미 너무 좋았다.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휘어졌던 그늘은 이제 보이지 않았다. 그랬다고, 나는 속으로
 
  그래도 될까, 그제야 울음을 그친 내가 묻는다. 어깨에 손을 올리는 일은 언제나 어렵다. 울다가 웃으면 큰일난다. 어깨에 손을 올리려고 노력하는 내가 말했다. 조각조각난 물방울이 어두운 거실을 채워간다. 나는 흔하고, 어디든 있고, 그러니 내가 혼자서 울고 있는 것도 나쁘지는 않아, 더듬대며 말하는 소리
 
  그냥, 거실이, 사람이, 그러니까 내가, 오늘이, 참 좋은 오늘의 날씨가, 말씀이, 그녀의 병과 내가, 누군가의 복도가 마냥 어둡고 축축한 아니 서럽고 또 흘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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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안녕, 어느 여름날의 서늘한 그늘처럼 나는 네게 바짝 붙어 있는 귀야. 네가 세상 모르게 잠들었을 때도 나는 너의 숨소리를 듣고, 너의 콧소리를 듣지. 네가 밤새 켜두는 TV에서 느닷없이 북한 아나운서의 억양이 높아졌어. 이 모든 것이 공기의 진동이야. 그리고 어디선가 종소리가 들렸어. 이런 밤중에 종을 치는 사람은 누굴까. 나는 너를 파도처럼 흔들어 깨우고 싶어.
 
2.
어느 날은 늙은 어머니가 네 방으로 건너와서 40년 전 어느 젊은 여자의 어리석음에 대해 한탄했네. 여자는 아름다웠지만 아름다움을 자신에게 이롭게 사용할 줄 몰랐네. 잘 자라, 가엾은 아가야. 이 모든 것이 화살이란다. 너는 잠든 척했어. 나는 너의 숨소리를 듣고, 너의 숨죽인 비명을 듣고, 늙은 여자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우는 소리를 들어. 그 날 나는 너의 침묵을 이해했지. 너는 나처럼 말을 하지 못하는구나. 이 모든 것이 그냥 지나가길 빌었어. 그리고 어느 날 그녀가 죽었어.
 
3.
어디선가 제 가슴을 치는 사람이 있고 어디선가 제 주먹이 깨지도록 벽을 치는 사람이 있겠지. 내가 듣지 못하는 소리들이 어디선가 공기를 울리고 있어. 내게는 들리지 않는데 너에게는 들리는 소리들을 상상해. 네가 나를 게걸스럽게 잡아 먹는 꿈을 꿔. 나는 너를 높은 파도처럼 집어 삼키고 싶어. 수도꼭지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이 모든 것이 공기의 충돌이야. 이 모든 것이 행성의 충돌이야. 벽을 치는 사람에게는 벽에 세워두고 싶은 그, 그 사람이 있어. 피부를 찢고 피가, 피가, 피가 났어. 이 모든 것이 파편이야.
 
4.
또 어느 날은 네가 허공에 대고 혼잣말을 하고 있지. 혼자 하는 말은 혼자 하는 생각과 얼만큼 비슷한 걸까. 나는 말벗이 될 수 없구나. 대신 비밀이 되어줄게. 나는 아무도 모르게 커져서 먼 훗날 너를 품에 안고 고요하게 폭발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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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 사랑할수록 죄가 되는 날들. 시들 시간도 없이 재가 되는 꽃들. 말하지 않는 말 속에서만 꽃이 피어 있었다. 천천히 죽어갈 시간이 필요하다. 천천히 울 수 있는 시각이 필요하다. 품이 큰 옷 속에 잠겨 숨이 막힐 때까지. 한 줄 쓰면 한 줄 지워지는 날들. 지우고 오려내는 것에 익숙해졌다. 마지막은 왼손으로 쓴다. 왼손의 반대를 무릅쓰고 쓴다. 되풀이되는 날들이라 오해할 만한 날들 속에서. 너는 기억을 멈추기로 하였다. 우리의 입말은 모래 폭풍 속으로 사라져버린 작은 집 속에 있다. 갇혀 있는 것. 이를테면 숨겨온 마음 같은 것. 내가 나로 살기 원한다는 것. 너를 너로 바라보겠다는 것. 마지막은 왼손으로 쓴다. 왼손의 반대를 무릅쓰고 쓴다. 심장이 뛴다. 꽃잎이 흩어진다. 언젠가 타오르던 밤하늘의 불꽃. 터져 오르는 빛에 탄성을 내지르며, 나란히 함께 서서 각자의 생각에 골몰할 때. 아름다운 것은 슬픈 것. 슬픈 것은 아름다운 것. 내 속의 아름다움을 따라갔을 뿐인데. 나는 피를 흘리고 있구나. 어느새 나는 혼자가 되었구나. 되돌아보아도 되돌릴 수 없는 날들 속에서. 쉽게 찢어지고 짓무르는 피부. 멍든 뒤에야 아픔이라 발음하는 입술. 모래 폭풍은 언젠가는 잠들게 되어 있다. 다시 거대한 폭풍이 밀려오기 전까지. 너와 나라는 구분 없이 빛을 꽃이라고 썼다.

 

지천에 피어나는 꽃. 피어나면서 사라지는 꽃. 하나 둘. 하나 둘. 여기저기 꽃송이가 번질 때마다 물든다는 말. 잠든다는 말. 나는 나로 살기 위해 이제 그만 죽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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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방 창문에선 나무들이 아주 가까이 보여. 가끔 나무가 흔들리다가 눈빛이 검게 변할 때가 있는데 그럴 땐 소스라치게 놀라곤 해. 정신을 차리고 다시 보면 나무는 그저 나무일뿐이지만,
종이로 만든 새를 날려 보낸다. 기도는 새가 될 수 있다고 몇 번이고 다짐하고 다짐하면서. 문틈으로 스며드는 빛을 보며 제발 나를 찌르지 말아달라고 말한다.
맹수를 쏘고 꿈에서 깨어났어. 아니, 번번이 죽은 짐승이라는 걸 확인하기 위해서 쏘았지. 무엇이 진짜인지 모르겠어. 손에 들린 가위와 머리카락,
안으로 잘 닫혀 있는 물고기들처럼. 물에 가까운 얼굴을 갖기 위해 두 눈은 더 오래 흘러넘쳐야 하는지 모른다.
왜 아무 것도 살아 움직이지 않는 거야? 파랗게 질린 입술로 올려다보는 저녁. 날아가던 새떼가 멈춰 있는. 잘 깨지지도 않는 하늘.
외투가 먼저 돌아와 있는 방에서. 우리는 익숙하게 마주앉아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에겐 따뜻한 잠이 필요했다. 주저앉아 울 햇볕이라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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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2. 5. 15:21



장미를 노래하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다 오랜 세월, 어느 시인의 말에 붙잡혀왔던 까닭에.

진정한 시인은,

장미보다는 장미 너머의 그 무엇을 노래 할 수 있어야 한다던

그녀는 이미 이승을 떠났지만 나는

아직도 장미의 붉은 매혹 너머의 그 무엇을

알지 못한다 견자의 꿈이여


내 너를 너무나 사랑하여

아직 장미의 꽃 그늘을 떠나지 못하고 있구나

장미를 찾아든 벌레의 비밀한 사랑처럼

네가 나를 갉아먹는 줄도 모르고


그래도 여전히 내 상한 영혼은 장미의 창을 두드린다

정작 장미의 노래는 부르지도 못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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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2

한용운, 잠꼬대

2016. 12. 5. 15:20



사랑이라는 것은 다 무엇이냐 진정한 사람에게는 눈물도 없고 웃음도 없는 것이다 사랑의 뒤웅박을 발길로 차서 깨트려버리고 눈물과 웃음을 티끌 속에 합장(合葬)하여라 이지(理智)와 감정을 두드려 깨쳐서 가루로 만들어버려라

그리고 허무의 절정에 올라가서 어지럽게 춤추고 미치게 노래하여라 그리고 애인과 악마를 똑같이 술을 먹여라 그리고 천지가 되든지 미치광이가 되든지 산 송장이 되든지 하여 버려라


그래 너는 죽어도 사랑이라는 것은 버릴 수가 없단 말이냐 그렇거든 사랑의 꽁무니에 도롱태를 달아라 그래서 네 멋대로 끌고 돌아다니다가 쉬고 싶거든 쉬고 자고 싶으거든 자고 살고 싶으거든 살고 죽고 싶으거든 죽어라

사랑의 발바닥에 말목을 쳐놓고 붙들고 서서 엉엉 우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이 세상에는 이마빡에다 '님'이라고 새기고 다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연애는 절대 자유요 정조는 유동(流動)이요 결혼식장은 임간(林間)이다 나는 잠결에 큰 소리로 이렇게 부르짖었다


아아 혹성같이 빛나는 님의 미소는

흑암(黑闇)의 광선에서 채 사라지지 아니하였습니다 잠의 나라에서 몸부림치던 사랑의 눈물은 어느덧 베개를 적셨습니다 용서하여요 님이여 아무리 잠이 지은 허물이라도 님이 벌을 주신다면 그 벌을 잠을 주기는 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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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 늘어진 태양이 속살을 헤집는다 입김 하나가 바꿔놓은 바람의 방향을 추적하면 당신이 오래 전에 적어놓은 미래의 기별을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른다 골목 어귀에 숨어 오수에 빠진 고양이의 갈색 털 한 가닥이 얕게 가라앉은 시간의 등피를간질인다 영원이 들려주는 음악이란 이토록 가벼운데 창 밖에서 쿵쾅쿵쾅 대기를 지압하며 넘어오는 피아노 소리는 숨막히게 슬픈 곡조만 헛된 꽃가루처럼 날려댄다

 

슬픔이 이토록 구차한 것인 줄 미리 알았더라면 나는 오래 전에 사막으로 건너가 뜨거운 피를 말렸을 것이다 세월이 빠져나간 몸뚱이는 병든 바다처럼 오래된 물길을 떠올리며 미지근해진 머릿속의 잔해들을 헤쳐나간다 몸이 지난 자리마다고여 있는 기억들을 수시로 처가는 건 내일에 속하는 그때의 바람일 뿐, 영원한 현재 속에 갇힌 이 짧은 죽음은 잠에서 깬 고양이가 다른 골목으로 불현듯 사라지는 모습처럼 도대체 정체가 없다 오로지 빚을 진 데라고는 죽음밖에 없는 내가 순간마다 바뀌는 바람의 방향 속에 모든 죽음을 완성해버린 것이라면 그토록 가혹한 부채탕감이 또 있겠는가

 

이 길고도 얕은 잠은 당신이 미리 써버린 과거의 내 일기라는 걸 알더라도 나는 여전히 당신을 아는 척할 수 없다 늦은 밤 집 앞에서 다시 만난 갈색 고양이의 푸른 눈빛이 무언가 알려준다 하더라도 밤이 되도록 끊이지 않는 이 검은 피아노의 하소연에 응해줄 대답을 나는 오래 전에 다 뱉어버리고 말았다 피아노 소리가 멈추고 나서야 고양이 눈 속에 숨은 당신은 비로소 나의 기록들을 전부 펼쳐 보이겠지만 지금은 바람이 없기에 깨어남도 망가짐도 없다 뚜렷하게 죽어 있느니 혼란스레 사라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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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2

이용한, 가지 마

2016. 10. 19. 17:09



너의 골목에 아픈 몰골이 번진다 신길동이거나 통영이어도 관계없는 밤은 혼자 깊어졌고, 내가 평생 흘릴 눈물을 너는 단숨에 쏟아냈다 바람이 언덕을 흔드는 날엔 시집 속에서 묵은 나뭇잎을 건진다 어쩔 수 없다는 거 알아요 아침에 세 알, 저녁에 네 알, 알약이 없으면 잠도 없고, 이별도 없겠죠 밤마다 잠들지 못하는 너를 읽다가 나는 손가락 끝으로 반쯤 죽은 너를 만진다 너의 아픈 발목을 하염없이 들여다본다 너의 잠 속에 어떤 괴물이 사는지, 누가 망가진 너를 덮어 놓았는지, 어떤 페이지는 붉고, 어떤 독서는 까마득했다 아침은 악몽이었고, 저녁은 고통이었다 괜찮다고 말하는 너는 한 번도 괜찮은 적이 없었다 옥탑방에 퀭하게 뜨던 달과 목련과 혼절하던 밤들, 연기로 그득한 눈과 아직도 이불 속에 웅크린 소녀, 정수리에 한 뼘쯤 난 상처를 보여주며 너는 파꽃처럼 웃었다 잇속에 울음을 한가득 물고 웃는 여자를 보고 나도 잠깐 웃었다 되도록 나는 울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너의 뜻이 아니므로 안부 따위 묻지도 않겠다 너를 사랑하는 일은 애당초 마음을 긁히는 일이어서 나는 자꾸 뒤척이며 작아졌다 오늘따라 당신이 말아 주던 말간 국수가 먹고 싶었고, 유언처럼 손바닥에 가지 마, 라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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