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 2

이용한, 가지 마

2016. 10. 19. 17:09



너의 골목에 아픈 몰골이 번진다 신길동이거나 통영이어도 관계없는 밤은 혼자 깊어졌고, 내가 평생 흘릴 눈물을 너는 단숨에 쏟아냈다 바람이 언덕을 흔드는 날엔 시집 속에서 묵은 나뭇잎을 건진다 어쩔 수 없다는 거 알아요 아침에 세 알, 저녁에 네 알, 알약이 없으면 잠도 없고, 이별도 없겠죠 밤마다 잠들지 못하는 너를 읽다가 나는 손가락 끝으로 반쯤 죽은 너를 만진다 너의 아픈 발목을 하염없이 들여다본다 너의 잠 속에 어떤 괴물이 사는지, 누가 망가진 너를 덮어 놓았는지, 어떤 페이지는 붉고, 어떤 독서는 까마득했다 아침은 악몽이었고, 저녁은 고통이었다 괜찮다고 말하는 너는 한 번도 괜찮은 적이 없었다 옥탑방에 퀭하게 뜨던 달과 목련과 혼절하던 밤들, 연기로 그득한 눈과 아직도 이불 속에 웅크린 소녀, 정수리에 한 뼘쯤 난 상처를 보여주며 너는 파꽃처럼 웃었다 잇속에 울음을 한가득 물고 웃는 여자를 보고 나도 잠깐 웃었다 되도록 나는 울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너의 뜻이 아니므로 안부 따위 묻지도 않겠다 너를 사랑하는 일은 애당초 마음을 긁히는 일이어서 나는 자꾸 뒤척이며 작아졌다 오늘따라 당신이 말아 주던 말간 국수가 먹고 싶었고, 유언처럼 손바닥에 가지 마, 라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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