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 2

유지소, 해충의 발생

2016. 10. 19. 16:57



너의 핏방울을 콕콕콕 찍어서 편지를 쓰고 싶었어 너의 연분홍 손톱 밑에 편지를 쓰고 싶었어 그 저녁이 생각나니? 너의 손가락이 한없이 길어지던 그 골목은 생각나? 사랑도 아니고 혁명도 아니고 겨우 말라비틀어진 탱자 하나 때문에 너를 닮은 탱자 하나 때문에 누군가는 피를 흘리고 누군가는 죽을 듯이 비명을 지르던 그 세계 

 

네가 각각 다른 열 개의 손톱을 가졌으니 나는 각각 다른 열 개의 장미꽃을 그릴 수도 있었어 내 피는 얼음처럼 차갑고 너의 피는 드라이아이스처럼 뜨거우니까 나는 너무 심심해서 토할 것 같고 너는 너무 바빠서 토할 것 같으니까 비록 그것이 거짓일지라도 우리는 모두 그런 척해야 하니까 그런 척해야 비로소 사람 같아 보이니까


적어도 한 번 이상 죽어 본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는 농담들 죽은 사람도 살려 낸다는 신비한 약초에 관한 민간요법들 이웃집 보일러 아줌마와 송이버섯 아저씨의 불륜에 관한 확고한 소문들 그런 것은 굳이 우리 역사에 필요 없는 이야기들


너의 손톱 병정들은 매일 새로운 갑옷으로 무장하고 너의 손톱 성벽을 굳세게 지키고 있었어 네 손톱 밑에 살고 있는 너 토성의 고리처럼 너를 떠나면서 너를 떠나지 못하고 있는 너 네가 사랑하는 너 사랑할 수밖에 없는 너


기어코 너에게 편지를 쓰고 싶었어 네가 모르는 너의 얼굴에 대하여 좌절과 분노가 아니라 순수한 순간의 통증으로 찡그린 너의 얼굴에 대하여 그것은 마치 콧등으로 나에게 윙크를 하는 것 같았어 콧등으로 오래전에 잃어버린 네가 너에게로 돌아오는 것 같았어


오늘보다 내일 네가 조금 더 많이 아팠으면

너의 심장에도 각각 다른 백 개의 손톱이 붙어 있었으면

네가 진짜로 죽어 버렸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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