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 사각 프레임에 밝고 어두운 음영이 깔리고. 보인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 마부의 손바닥에 돋아나는 풀. 손금길 따라 초록을 달리는 한몸, 두 피사체. 윤기 나는 갈기. 치닫는 속도를 버티는 딴딴한 근육. 발자국마다 남겨지는 기름진 빛다발. 알레그로에서 안단테로 잦아드는 컷. 숨을 고르고 몸을 핥는다. 클로즈업 된 조명 속에서 오랜 노부부처럼 깃들어.

 

언제까지 풀만. 어디까지 달리기만. 허락도 없이 고삐를 틀어쥐고 달라붙은 그림자. 순종이 아닌 맹종을 손바닥 안에 가둔 채, 주먹을 꽉 쥔. 숨이 막혀요, 버둥거리는 목소리 못 들은 척. 이제, 질기게 꼬인 이 줄을. 끊어내자. 너무 오랫동안 달려왔어. 겨우 손바닥만 한 곳에서. 겨우.

 

안장을 떼어내니 등에 날개가 돋을 것 같아. 이렇게 가벼웠다니. 목줄을 끊고 나온 건 쓸 만한 짓이었어. 어슬렁거려야지. 채찍도 없잖아. 가능한 느리게 처음 보는 풀만 뜯는다. 배를 채우고 낮잠에 들던 몸이 갑자기 들썩인다. 머리와 몸통, 다리가 분리될 듯이. 서로를 비틀어 밀어내는 모양새로. 꾸웩꾸웩 토사물을 쏟는다. 몸속 기관 하나하나를 짓이겨 짜는 듯한 괴음이 크레센도로 울린다. 앵글의 초점이 비틀거린다. 몸이 날뛰기 시작한다. 공중으로 솟았다 바닥에 튕겨져 구른다.

 

조명이 손바닥을 다시 비출 때. 고개 돌려, 목에 새겨진 끈 흔적을 감추며. 피고름 흐르는 발바닥을 프레임 밖으로 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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