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 2

이 순간, 김소연

2018. 8. 15. 20:29

나는 주머니 속에서 불거져 나온 주먹처럼 

너는 주먹 안에 쥐어진 말 한마디처럼

나는 꼭 쥔 주먹 안에 고이는 식은 땀처럼

너는 땀띠처럼


 


너는 높은 찬장 속 먼지 커다란 대접처럼

나는 담겨져 찰방대는 한 그릇 국물처럼


 


너는 주둥이를 따고 몸을 마음에게 기울인다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따라지기를

나는 기울였다 세워진 술병처럼 반은 비어 있다

마개처럼 테이블 아래로 떨어져 몇 바퀴를 돌다 멈춘다


 


나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너는 벽을 껴안고

나는 미안하다며 무릎을 끓고

너는 고맙다며 두 팔을 뻗고


 


나는 미친 척하고

너는 제 정신인 척하고


 


나는 부딪힐 때마다 소리를 지르는 빗방울이 되어

흔적만이 환한 눈송이가 너는 되어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어서 행복한 너와

이미 만났었기 때문에 괜찮다는 나는

심장이 멎을 것 같은 나는

심장이 제대로 뛰기 시작하는 너는


 


이제야 죽고 싶어진다고 말한다

내가 태어나고 싶어지는

이 순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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