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 2

허수경, 딸기

2022. 4. 8. 01:53



당신이 나에게 왔을 때 그때는 딸기의 계절
딸기들을 훔친 환한 봄빛 속에 든 잠이
익어갈 때 당신은 왔네​

미안해요, 기다린 제 기척이 너무 시끄러웠지요?
제가 너무 살아 있는 척했지요?
이 봄, 핀 꽃이 너무나 오랫동안
당신의 발목을 잡고 있었어요

우리 아주 오래전부터
미끄러운 나비의 날갯짓에 익어가던 딸기처럼 살았지요
아주 영영 익어 버린 봄빛처럼 살았지요

당신이 나에게로 왔을 때
시고도 달콤한 딸기의 계절
바람이 지나다가 붉은 그늘에 앉아 잠시 쉬던 시절

손 좀 내밀어
저 좀 받아 주세요
푸른 잎 사이에서 땅으로 기어가며 익던 열매 같은
시간처럼 받아 주세요

당신이 왔네
가방을 내려놓고 이마에 맺힌 땀을 닦네
저 수건, 태양이 짠 목화의 솜
작은 수건에 딸기물이 들 만한 저녁 하늘처럼
웃으며 당신이 딸기의 수줍은 방으로 들어와
불그레해지네 저 날숨만 한 마음속으로 지던
붉은 발걸음 하나

미안해, 이렇게 오라고 해서요
미안해, 제가 좀 늦었어요
한 소쿠리 가득한 딸기 속에 든
붉은 비운을 뒤적이는 빛의 손가락 같은 간지러움

당신이 오늘 계절,
딸기들은 당신의 품에 얼굴을 묻고
영영 오지 않을 꿈의 입구를 그리워하는 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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